『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박상순 / 세계사
나는 시간을 만든다
나는 시간을 만든다. 허리를 만들고 앞가슴을 만들고, 머리를 만든다. 나는 그녀를 만들었다.
진흙으로 뭉쳐진 그녀를 다 만든 뒤 두 손을 털며 문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흙반죽 어지러이
흩어진 작업대 위에서 쉬임없이 허둥댄다.
그녀는 내가 두고 온 크림빵을 먹으려고 애쓴다. 받침대에 붙박인 한쪽 발을 떼어내려 한다.
그사이, 내가 작업대 밑에 놓고 온 사진들, 내 사진들을 내려다보며, 사진 속에 앉아 있는 나를
부른다.
그녀는 사진 속에서 나를 본다. 바다를 본다. 들길을 보고, 황혼을 확인하고, 내가 빠져나온
작업실에서 마침내 빠져나와 내 그림자를 앞질러 간다.
나는 시간의 꿈 밖에 앉아, 작업실 밖 빈터에 앉아, 짐차를 기다린다. 멀리 갔던 그녀가 짐차를
타고 내게로 온다. 내 작업실을 싣는다. 작업대를 싣고 간다. 그녀의 차바퀴가 픽픽댄다. 바람이
샌다.
나만 홀로 짐차에서 내린다. 바람 빠진 그녀의 짐차가 내 작업대만 싣고 간다. 나는 사진을 찍
는다. 시간을 기록한다. 뿌리뽑힌 집터에 앉아 지붕을 생각한다. 별을 만든다. 작업대를 만든다.
별 속에 만든다. 진흙을 만든다. 작업대가 진흙으로 나를 만든다.
[감상]
몽환적인 분위기의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의 가장 큰 포인트는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꿈이든 현실이든 이 시는 장자의 나비처럼 끊임없는 메비우스의 띠를 형성하면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산문시일 경우 단문으로 해야한다는 정통기법을 잘 살린 점도 좋고요, 그녀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 도입부와, 마지막 작업대가 화자를 만드는 환치 또한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