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솔 / 2001 시문학 당선 시
나무는 뿌리로 다시 산다
봉정암으로 오르는 비탈에
뿌리들이 온통 제몸을 드러내고 있다
밀월의 달콤함도 부끄러움도 모른다
미끄러지는 바위길에
뿌리를 딛고 올라가고
뿌리를 잡고 건너간다
뿌리는 전혀 은밀하지 않고
부끄럼도 없이 무엇이든 되어 준다
뿌리는 바위 틈에 숨었다가
흙 속에 묻혀 있다가
켜켜이 쌓인 낙엽 속에서 꿈꾸다가
숨가쁜 이들을 붙잡아 준다
세월만큼 너그러운 손으로
봉정암에서 내려오면서 알았다
나무는 죽어서도 사랑을 버리지 못해
뿌리 끝까지도 내어 놓음을.
[감상]
봉정암 뿌리를 드러낸 나무에게 "사랑"을 대입시켰군요. 그래서 이 시는 선명합니다. 제목 "나무는 뿌리로 다시 산다"는 등산객의 손잡이가 되어주는 뿌리에 대한 깊은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일관된 직관력으로 처음부터 뿌리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고요. "알았다"라는 깨달음. 시로 인하여 간접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