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틀니가 자라는 폐가 - 이혜진

2002.09.02 18:23

윤성택 조회 수:1121 추천:219

틀니가 자라는 폐가 / 이혜진/  『리토피아』가을호(2002)



        틀니가 자라는 폐가



   서른 개의 울타리가 삐걱거리는 폐가 안쪽에, 그만 神이 들어섰네
왼쪽 잇몸 끄트머리부터  죽은 대나무가 주루룩 종유석처럼  자라났
네 그때부터 폐가에서는 구멍 뚫린 창호지 사이로 설익거나  부패한
영혼들이 새어나왔네  바람이 불 때마다 박제된 누런 혼들이 펄럭거
렸네 아무도 없는 폐가에서는 가끔 염불소리가 들리고 향 피우는 냄
새가 났네 밤마다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네 약 한첩 못쓰고 죽은
동자신이란 말도 돌고 겁탈당해  죽은 열아홉 처녀신이란 말도 돌았
네 돌면 돌수록 폐가는  밑을 벌린 미궁이 되어갔네 잠잠하다싶으면
폐가는 나 보라는 듯 곡을 했네 날카로운 곡소리는 귓구멍을 쑤셔댔
네 숨구멍을  쑤셔댔네 그렇게 몇 달이  흐른 후 마침내 굿이 열렸네
이젠 됐다며, 깔깔거리며 웃는 얼굴들의 입구멍에서  슬금슬금 수상
한 바람이 기어나왔네 작두를 타는 늙은 무녀에게 神이 들리자 갑자
기 천장 네 쪽에서 철커덩, 쇠틀이 씌워졌네 쇠틀에 갇힌 神, 오늘도
오물오물 혼을 삼키고 있네  세 살배기 손자의 귀를 잡고 이  오래된
얘기를 들여주고 있네


  
[감상]
이런 마을의 폐가를 본 적 있습니다. 밤마다 들리는 이상한 소리 때문에 그곳에 새로 이사온 사람들도 얼마를 버티지 못하고 떠나갔습니다. 어쩌면 소문이 그 집에 머물며 주인 행세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시를 읽다보면 시에 서려 있는 운율이 마치, 혼잣말처럼 서늘하다는 느낌입니다. "세 살배기 손자"부분에 이르러서는 혼의 전이轉移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딸랑딸랑 종을 치며 소곤소곤 혼잣말하는 섬뜩함, 우리가 들어야할 몫인가 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11 골목 - 박판식 2002.08.05 1521 194
910 소쩍새에게 새벽을 묻는다 - 심재휘 2002.08.07 1162 233
909 달1 - 박경희 2002.08.08 1503 241
908 단체사진 - 이성목 2002.08.09 1482 229
907 별 - 김완하 2002.08.12 2923 249
906 옥평리 - 박라연 2002.08.14 1380 244
905 매화 - 최승철 2002.08.22 1468 212
904 알레르기 - 장성혜 2002.08.27 1201 206
903 환청, 허클베리 핀 - 김 언 2002.08.30 1177 233
902 이별 후의 장례식 - 김충규 2002.08.31 1217 205
» 틀니가 자라는 폐가 - 이혜진 2002.09.02 1121 219
900 심야 배스킨 라빈스 살인사건 - 조동범 2002.09.03 1162 202
899 쿨럭거리는 완행열차 - 송종규 2002.09.05 1062 179
898 적(跡) - 김신용 2002.09.06 1013 172
897 사진1 - 이창호 2002.09.09 1230 190
896 다비식 - 신용목 2002.09.13 1071 219
895 유년 - 정병근 2002.09.16 1060 189
894 러브 어페어 - 진은영 2002.09.17 1298 194
893 산은 넘는 자의 것이다 - 정숙자 2002.09.18 1159 205
892 단추 - 박일만 2002.09.19 1297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