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넘는 자의 것이다/정숙자 / 2002년『문학과창작』 9월호
산은 넘는 자의 것이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거기서부터가 산이다
산을 넘지 못하면 그 너머 길을 잇지 못한다
평지에 허리를 감춘 산은 압구정동 네거리 거실 의자 중환자실 침대 위에도 있다
산을 허무는 일이야 산을 일으킨 바람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혼자다
갈수록 비탈일 수밖에 없다
많은 이가 한 길을 함께 걸어도 그 길은 제가끔 다른 길이다
관점이 길을 바꾼다
지상에 난 모든 길은 관점으로 가는 길이다
산을 오래 타다 보면 사람도 산이 되는지 얼굴 어딘가 폭포가 숨고 이끼가 끼고 나비가 되지 않는 벌레도 안고 키운다
전생을 건너온 발이 여기 발아된 그 순간부터 산이 매복하고 있었던 게다
많기도 하지
어디든 눈을 던지면 산이 산을 업고 또 기대고 있다
어둠이 다락같은 저 붉은 산들을 누가 다 넘어 갔을까
[감상]
산으로 확장되는 사유가 와닿습니다. '산'은 우리에게 수많은 은유를 선사하여서, 넘어야할 그 이유가 삶의 통과의례만 같습니다. 산이 사람을 기다리는 이유는 이처럼 새로운 열망에 대한 포용이 아닌지요. 여태 산은 우리를 기다립니다. 넘고 나면 다 꿈 같은 어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