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최금진/ 2002년『시와반시』 여름호
섬
섬이 헝클어진 하늘을 머리까지 말아 올려
몇 개의 핀처럼 저녁별을 꽂는다
여자는 산신당 옆 밭둑에 앉아
검은 가죽잠바를 뒤집어쓰고
제 발톱인 줄도 모르고 뜯어먹는 흑염소들을 보며
까르르 웃는다 남편이 남기고 간
작은 머리통에 다 담을 수 없는 운명을 뿔에 달고
쿡쿡 소나무를 치받는 염소들은
똥도 소심하게 까맣다
아까부터 같은 자리만 도는
작은 어선들 뒤로 물길은 생겼다간 금세 지워지고
물 위의 길, 걸어서는 가 닿을 수 없는
일몰이 구덩이처럼 깊어질 때
섬의 아랫도리에선
뭉클뭉클 속살을 만지며 갯내음이 기어올라온다
여자는 있는 힘껏 돌을 집어 던진다
어둠의 수위는 그만큼 차 오른다 하나, 둘
산신당 촛대에 없는 이들의 얼굴이 켜지고
언덕을 내려가는 염소들의 수염 끝에서 수평선이 지워진다
흰 뼛조각처럼 바다 위에 널린 부표들은
절대 가라앉지 않는다
어딘가에 스스로 매여 있는 것을 모르는
매에에, 매에에, 염소들은
여자의 헐렁한 옷자락을 씹어먹는다 그것이
한번 담겨졌다가 오래도록 꺼내진 적 없는 몸의
낡은 포대 자루인 것을 모르고
[감상]
어디서 한번쯤은 보았음직한 실성한 여자, 그리고 섬과 염소와 어우러진 풍경들은 한 문장 한 문장 단단한 비유의 힘으로 묶여져 있습니다. 여자의 내력은 이 시의 깊이만큼이나 관조적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까요. 이제 제 몸을 염소에게 내어주며 같은 자리에 맴도는 여자, 자꾸만 어디서 한 번쯤 보았던 사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