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시작』/ 젊은시인61인합동시집(박옥순)/ 시작 (2001년 경향 신춘문예 당선)
냇물이 풀릴 때
날이 풀린다
어머니 개울가에서 빨래를 한다
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들썩이는 둥근 엉덩이
언제 터질지 모를 울음 꼭꼭 참아온
봉숭아 씨방처럼 부풀어 오른다
열아홉 녹의홍상 도망치듯 이끌려온 시집
구멍 뚫린 창호지 사이로 바라보던
동짓달 스무 이튿날, 초야의 서늘한 달무리
바람 잘 드는 서향집 기울어진 사랑채
용마루를 넘어온 예각의 햇살이
장지문 돌쩌귀를 파고들 때
고무신 돌려놓고 하늘바라기 하던 어머니
밤새 하얀 신발 속에 흥건히 고이는 별빛들
그리고 어둠의 탯줄을 끌고
몇 구비의 강을 건넌 뒤에야
희붐한 아침빛에 얼굴 내밀던 아이들
어머니, 그 정결한 이슬 맺혔던 붉은 소청 빤다
쩡쩡 마른기침으로 호령하는 얼음장 밑으로
올올이 풀리는 둥근 방의 기억들
오래 웅크리고 앉아 얼어붙은 세월 담금질하던 어머니
그 모습 아랫입술 깨물며 바라보던 단발머리 계집애
날이 풀린다
어느 등 푸르던 물고기의 비늘
눈 시린 박꽃처럼 둥 둥 둥 물줄기 따라간다
나는 까치발 뜨고 점점 씨방에서 멀어지는 길을
가늠해본다
그러나 저 부풀어 오르는 비린내가 언젠가
내 등에 푸른 작살을 꽂으리라
[감상]
이 정서를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세대와 세대를 건너며 어머니는 이제 구식 세탁기를 돌리고 계십니다. 살아가는 만큼 점점 잊혀지는 옛것들, 그것들에게 있어야할 자리를 만들었다는 느낌입니다. 등 푸른 생선이 되어 막막한 대양으로 떠나온 우리가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었을 때 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