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냇물이 풀릴 때 - 박옥순

2002.10.01 13:19

윤성택 조회 수:1186 추천:209

『즐거운 시작』/ 젊은시인61인합동시집(박옥순)/ 시작 (2001년 경향 신춘문예 당선)




       냇물이 풀릴 때



        날이 풀린다
        어머니 개울가에서 빨래를 한다
        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들썩이는 둥근 엉덩이
        언제 터질지 모를 울음 꼭꼭 참아온
        봉숭아 씨방처럼 부풀어 오른다

        열아홉 녹의홍상 도망치듯 이끌려온 시집
        구멍 뚫린 창호지 사이로 바라보던
        동짓달 스무 이튿날, 초야의 서늘한 달무리
        바람 잘 드는 서향집 기울어진 사랑채
        용마루를 넘어온 예각의 햇살이
        장지문 돌쩌귀를 파고들 때
        고무신 돌려놓고 하늘바라기 하던 어머니
        밤새 하얀 신발 속에 흥건히 고이는 별빛들
        그리고 어둠의 탯줄을 끌고
        몇 구비의 강을 건넌 뒤에야
        희붐한 아침빛에 얼굴 내밀던 아이들

        어머니, 그 정결한 이슬 맺혔던 붉은 소청 빤다
        쩡쩡 마른기침으로 호령하는 얼음장 밑으로
        올올이 풀리는 둥근 방의 기억들
        오래 웅크리고 앉아 얼어붙은 세월 담금질하던 어머니
        그 모습 아랫입술 깨물며 바라보던 단발머리 계집애

        날이 풀린다
        어느 등 푸르던 물고기의 비늘
        눈 시린 박꽃처럼 둥 둥 둥 물줄기 따라간다
        나는 까치발 뜨고 점점 씨방에서 멀어지는 길을
        가늠해본다
        그러나 저 부풀어 오르는 비린내가 언젠가
        내 등에 푸른 작살을 꽂으리라


[감상]
이 정서를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세대와 세대를 건너며 어머니는 이제 구식 세탁기를 돌리고 계십니다. 살아가는 만큼 점점 잊혀지는 옛것들, 그것들에게 있어야할 자리를 만들었다는 느낌입니다. 등 푸른 생선이 되어 막막한 대양으로 떠나온 우리가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었을 때 문득.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891 뒤통수- 장승리 2002.09.23 1140 208
890 음암에서 서쪽 - 박주택 2002.09.24 1086 240
889 숨쉬는 일에 대한 단상 - 이가희 2002.09.25 1218 219
888 가을날 - 이응준 2002.09.26 3601 259
887 달팽이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 박성우 2002.09.27 1268 225
886 섬 - 최금진 2002.09.30 1554 219
» 냇물이 풀릴 때 - 박옥순 2002.10.01 1186 209
884 하수구의 전화기 - 김형술 2002.10.04 1025 204
883 집 - 이기철 2002.10.07 1447 211
882 용설란 - 최을원 2002.10.08 1120 218
881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 박찬일 2002.10.10 1112 232
880 근미래(近未來)의 서울 - 이승원 2002.10.11 1063 208
879 우체국 계단 - 김충규 [1] 2002.10.14 1310 192
878 흐르는 물에도 뿌리가 있다 - 김명인 2002.10.15 1359 227
877 편지 - 송용호 2002.10.16 1693 213
876 아내의 브래지어 - 박영희 [1] 2002.10.17 1572 214
875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1 - 박현수 2002.10.18 1298 209
874 수선화 - 이재훈 2002.10.22 1190 205
873 생의 온기 - 김완하 2002.10.23 1303 192
872 벚나무, - 강미정 2002.10.24 1352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