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박현수/ 청년정신(92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1
- 유예
좀처럼 오지 않던
154번 버스 같은 우리의 이별은
한 번은
무너지는 탑처럼 어깨를 치리라
그 해 겨울,
유예를 계산하던
나의 관습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는
나의 손금에서 불안을 읽어내고 있었다
도깨비풀처럼 몸에 붙는
백야의 그 지리한 대화를 우리는
몰래 털어내고 싶어했지
그 때 뿔뿔이 떠난
우리들의 사색이 다다른 곳은 어디였을까
그 해 겨울,
우리 사랑은
길가 도랑에 쓰러진 채
기억의
헛바퀴만 굴리고 있었으니
사랑이 더 이상
생을 감당하지 못 할 때
154번 버스는 떠나가는 것이다
[감상]
좋은 시는 시간이 오래 흘러도 시 속에 배여 있는 향기가 은은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알 수 없는 묘한 이끌림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유예'라는 시어 때문이었을까요. 이렇게 자꾸만 이 계절에 미련이 드는 이유는 불안, 사색, 사랑, 기억이 낙엽만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154번 버스에 휩쓸려 한바탕 흐려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