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놓인다』/ 김완하/ 문학사상사
생의 온기
더러는 아픈 일이겠지만
가진 것 없이 한겨울 지낸다는 것
그 얼마나 당당한 일인가
스스로를 버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몰아치는 눈발 속에서
눈 씻고 일어서는 빈 벌판을 보아라
참한 풀잎들 말라 꺾이고
홀로의 목마름 속
뿌리로 몰린 생의 온기,
함박눈 쌓이며 묻혀 가는 겨울잠이여
내가 너에게 건넬 수 있는 약속도
거짓일 수밖에 없는 오늘
우리 두 손을 눈 속에 파묻고
몇 줌 눈이야 체온으로 녹이겠지만
땅에 박힌 겨울 칼날이야 녹슬게 할 수 있겠는가
온 벌판 뒤덮고 빛나는 눈발이
가진 건 오직 한줌 물일 뿐이리
그러나, 보아라
땅 밑 어둠 씻어 내리는 물소리에 젖어
그 안에서 풀뿌리들이 굵어짐을
잠시 서릿발 아래 버티며
끝끝내 일어설 힘 모아 누웠거늘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당당한 일인가
[감상]
어쩐 일일까요,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내 안 보일러가 쩔쩔 끓습니다. 뜨거운 피가 팔뚝이나 허벅지 그 어디 심줄을 관통하여 냉장고라도 들고 싶습니다. 그랬었구나, 우리가 함께 갔던 겨울 여행,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그 마당에 벌렁 누워 그리 당당했었구나. 청춘에 데인 상처, 뜨거운 꽃이 되어 끝끝내 나를 데우고 세상을 데워 죄다 아랫목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