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판화> / 정주연/ 2000년《시안》으로 등단
겨울판화
겨울바람에 두꺼운 구름이 밀려가고
버드나무 여린 가지들이 휘청거렸다
허공으로 솟구치는 가지들은
바라보는 탄식과 관계없이 마음에 소용돌이쳤다
사실 정류장에 버스가 오기까진
많은 나뭇잎이 날아다녔다
시위 장소를 알리는 흑백 전단 같은
시절은 알 수 없는 몸짓으로 다가 왔다
보기도 전에 밟힌 전단들은
닳아빠진 호주머니에서 궁금한 손이 나오기 전엔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때로 담장엔 철 아닌 겨울장미가 피었다가
그대로 얼어버리기도 했고
감쪽같은 교통사고가 로터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어김없이 목격자를 찾는 플래카드가
걷어들이지 않은 빨래처럼 오래 펄럭이겠지만
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꽉 찰대로 들어찬 겨울은 툭툭 실밥이 튿어져내리고
빗장 잠그는 소리 위로 눈 내리는 소리가 덧쌓였다
유리창엔 김이 기막히게 서리고
마음을 맴도는 말들은 한 마디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세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해 겨울 밤마다 모든 집의 눈이 붉었다
[감상]
시를 읽다보니 겨울 이미지가 정말 판화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화자에게서 일어나는 일상의 변화들은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처럼 덧없고, 이것들을 시각의 앵글로 잡아가는 풍경은 타인의 시선처럼 낯설어 보입니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가끔, 나 하나쯤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외롭고 쓸쓸할 때, 겨울밤 모든 집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