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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속도 - 장만호

2005.09.03 10:32

윤성택 조회 수:1492 추천:191

<무서운 속도>/ 장만호/ 《현대시학》2005년 9월호



        무서운 속도  

        다큐멘터리 속에서 흰수염고래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죽어가는 고래는 2톤이나 되는 혀와
        자동차만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나래이터는 말한다
        자동차만한 심장,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도 있는 심장.
        나는 잠시 쓸쓸해진다.
        수심 4,812미터의 심연 속으로 고래가 가라앉으면서
        이제 저 차 속으로는 물이 스며들고
        엔진은 조금씩 멎어갈 것이다. 그때까지
        마음은 어느 좌석에 앉아있을 것인가.
        서서히 한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고래가
        저 심연의 밑바닥으로 30분을 견딜 수 있는 한 호흡의 길이
        사이에서, 저 한없이 느린 속도는
        무서운 속도다. 새벽의 택시가 70여 미터의 빗길을 미끄러져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를 무서운 속도로 들이받던 그 순간
        조수석에서 바라보던 그 깜깜한 심연을,
        네 얼굴이 조금씩 일렁이며 멀어져가고
        모든 빛이 한 점으로 좁혀져 내가 어둠의 주머니에
        갇혀가는 것 같던 그 순간을,
        링거의 수액이 한없이 느리게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지금 가물거리는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음아,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니.
        고래야, 고래야 너는 언제 바닥에 가닿을 거니.        


[감상]
흰수염고래의 ‘자동차만한 심장’에서 비롯된 사유가 사고현장의 자동차로 이어지고, 서서히 한없이 가라앉는 고래의 속도가 교통사고 짧은 순간과 오버랩 되면서 이 시는 마음의 무게로 내려앉습니다. 죽어간다는 것, 그 과정을 물리적 시간으로 계측한다는 것은 영혼(마음)에 있어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고래의 죽음을 시간성에 두지 않고 <서서히 가라앉>는 공간성으로 바꿔낸 시인의 서정도 빼어납니다. 이처럼 예측할 수 없었던 두 개의 사물이 겹쳐지면서 이뤄낸 울림은, 시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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