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무대 - 유종인

2005.10.24 16:08

윤성택 조회 수:1486 추천:202

《교우록》 / 유종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무대

        비가 내린다. 여자는
        창가로 천천히 걸어간다. 기울어지듯
        모든 것은 다가온다. 빗소리를
        먼 박수 소리로 잘못 듣는 여자에겐
        추억도 찾아갈 무대와 같은 것일까

        아픔을 떠올리는 뿌리, 시간은
        불구의 길을 오래 걸었다. 그것은
        가장 그럴듯한 복원으로 가는
        몇 안 되는 계단이다
        
        그때 여자는 몇 계단을 밟아
        가장 빛나는 무대에 섰던 소프라노였는지도
        모른다. 가장 절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을 몰랐다. 빛에 둘러싸였으나
        그 빛은 어둠이었다. 자신보다 먼저
        관객의 박수 소리가 그의 시간을 소나기처럼 적셨을 따름이다

        이제 그녀의 무대는 낡은 수집이 돼버렸다.
        손님들은 가끔 풀린 눈빛으로 그녀의 전생까지도 궁금해하지만
        그녀는 기억의 틀니조차 제대로 끼울 수 없게
        손이 떨려올 때가 있다. 가끔 알 수 없는 슬픔이
        그녀의 목청을 울려보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못한다.
        끌어 모을 수 있는 관객은 침묵뿐이다

        침묵은 눈길을 안으로 끄는 소리일 뿐
        박수를 치는 빗소리들, 환영의 넓은 무대로
        그녀는 쓸쓸히 유배될 뿐이다. 그녀는
        불구의 끝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감상]
허름한 카페의 늙은 여주인이 창가에 기대어 듣는 빗소리, 어두운 무채색으로 짙게 드리워집니다. <빗소리>를 <먼 박수 소리>로 듣는 추억은 <가장 빛나는 무대>로 걸어가 그녀의 정체성에 이릅니다. 시간의 보폭과 길이가 기억 속에서 만들어지듯, 덧없이 흘러간 시간이 <소나기>에 오버랩 되어 밝음과 어둠, 박수와 침묵으로 되돌아 나옵니다. 가장 밝았던 <무대>의 시절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감명은 줄고, 기억에 빈틈이 생겨 시간도 빠르게 흘렀겠지요. 망각의 긴 어둠 속 드문드문 켜진 불빛과 같은 그곳에 한사코 불빛을 켜두고 찾아가고 있는 그녀의 고단한 회상이 절절합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 무대 - 유종인 [1] 2005.10.24 1486 202
350 객관적인 달 - 박일만 [3] 2005.10.25 1639 222
349 12월 - 강성은 [3] 2005.10.26 2074 240
348 흐린 하늘 - 나금숙 [2] 2005.10.27 2208 243
347 빨간 모자를 쓴 사내 - 문신 [1] 2005.10.28 1756 207
346 해바라기 - 조은영 [1] 2005.11.01 3023 251
345 옥상 - 정병근 [3] 2005.11.03 1847 227
344 분갈이 - 정용기 2005.11.05 1414 213
343 돌아가는 길 - 문정희 2005.11.09 1990 208
342 낙엽 - 이성목 [2] 2005.11.10 2520 228
341 겨울 저녁의 시 - 박주택 2005.11.12 1982 220
340 자전거, 이 강산 낙화유수 - 최을원 [2] 2005.11.15 1402 212
339 흔적 - 배영옥 [2] 2005.11.16 2277 250
338 월남 이발관 - 안시아 2005.11.17 1459 224
337 바람의 배 - 이재훈 [1] 2005.11.22 1687 206
336 가을이 주머니에서 - 박유라 [1] 2005.11.25 1763 218
335 토기 굽는 사람 - 최승철 2005.11.28 1528 218
334 바람의 목회 - 천서봉 [4] 2005.12.01 1978 227
333 추억 - 신기섭 [6] 2005.12.06 3154 232
332 겨울 그림자 - 임동윤 [2] 2005.12.07 2070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