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넘버나인에서의 하룻밤 - 심재휘

2007.11.26 17:48

윤성택 조회 수:1149 추천:136

『그늘』 / 심재휘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 / 《랜덤하우스》(2007)


        넘버나인에서의 하룻밤

        그해 겨울로 시작하는 모든 변명은
        넘버나인에서의 하룻밤 같은 것이다
        붉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손금을 헤아리거나        
        열 손가락 사이의 깊은 저편에 몸을 묻고 싶을 때        
        우르르 몰려갔던 그곳 영동선 철길 옆의
        낮고 푹신하였던 넘버나인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밤새 눈이 내렸던 그날 밤
        제법 쌍쌍이 앉아 수많은 신청곡을 적어냈지만
        내가 바라던 연애만은 끝내 흘러나오지 않아서
        어디론가 떠나가던 새벽 기차 소리를 들으며
        넘버나인 찌직거리던 네온사인 간판 아래
        그녀는 희미해져갔다

        이미 오래전에 문 닫은 넘버나인
        그 입구의 가로등 불빛에 대해서
        망설임에 관하여 눈이 내렸지만
        눈 내리는 날들은 모두 그녀 같았다
        눈을 뭉쳐도 꼭 쥔 주먹이 되지 않아서
        힘껏 던질 때마다 멀리 가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연애처럼 인생은 인생의
        몇 걸음 전에서 필경 흩어질 뿐이다
        그러니까 겨울 골목보다도 춥고 길던
        너무나 어둡던 그 밤의 문들을
        나는 왜 쾅 닫지 못하고 떠나온 것일까
        넘버나인에서의 하룻밤은 길기도 하다        


[감상]  
추억 속 음악다방은 여전히 성업 중입니다. DJ의 굵은 저음의 목소리, 회전하는 LP판처럼 아스라해지는 현기증. DJ에게 읽히기 위해 직유와 은유를 동원했던 사연들, 용케 그 분위기를 겪었던 80년대 말 고교생 입장에서는 참 행복한 때였지요. 추억에 눈이 내리는 이 시를 읽다보면 어느덧 내 안의 잊지 못할 어느 겨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연애처럼 인생은 인생의/ 몇 걸음 전에서 필경 흩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렇듯 따뜻한 추억의 온기입니다. 지하 1층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저녁놀이 억새를 붉게 물들이는 풍경, 벤츠 버스 좌석을 그대로 뜯어다 몸을 깊숙이 내맡길 수 있도록 만든 의자들, 진공관 앰프와 스피커로 거침없이 흘러넘치는 음악이 넘버나인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강릉이어도 좋고 대천이어도 좋고 당신의 마음 속이어도 좋겠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71 가을비 - 신용목 [1] 2007.08.11 1959 138
170 문을 닫다 - 문성해 2007.08.28 23689 98
169 주름 - 배영옥 [1] 2007.08.30 1260 105
168 기습 - 김은숙 2007.09.05 1244 120
167 루드베키아 - 천외자 [1] file 2007.09.07 1162 100
166 누군가 눈을 감았다 뜬다 - 황동규 2007.09.14 1406 102
165 보고 싶은 친구에게 - 신해욱 [1] 2007.09.19 1608 106
164 전봇대 - 박제영 [1] 2007.10.01 1337 117
163 퉁소 - 김선우 2007.10.12 1217 115
162 도망자 - 이현승 2007.10.17 1101 114
161 어떤 전과자 - 최금진 2007.10.23 1200 130
160 청춘 3 - 권혁웅 [1] 2007.10.30 1266 121
159 태양의 계보 - 홍일표 2007.11.05 1128 116
158 매포역 - 전형철 [1] 2007.11.06 1210 116
157 Across The Universe - 장희정 2007.11.12 1694 122
156 늦가을 회심곡 - 조현석 2007.11.20 1262 117
155 거기 - 조말선 2007.11.21 1245 122
» 넘버나인에서의 하룻밤 - 심재휘 2007.11.26 1149 136
153 회전목마 - 이경임 2007.11.27 1494 135
152 성에 - 김성수 [1] 2007.12.04 1481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