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문을 닫다 - 문성해

2007.08.28 10:24

윤성택 조회 수:23689 추천:98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 / 문성해 (1998년 『매일신문』,2003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 / 《랜덤하우스》(2007)


        문을 닫다

        우리 집이 이곳으로 이사 와서 사는 동안 참 많은 집이 문 닫았다
        맨 먼저 맥주 맛이 이 골목에서 제일이던 쿠바*가 문 닫자
        그곳에서 새벽까지 떠들던 술꾼들이 문밖으로 다 뿔뿔이 사라졌다
        술꾼들의 지린 오줌을 받아먹고 무성하던 공터의 잡풀들도 문을 닫고
        잡풀들 사이 걸린 거미집도 문 닫았다
        오겹살 맛이 기막히던 고그리*도 어느새 문 닫았고
        그 커다란 냉동고에 누워 있던 수많은 오겹살들이 구름 위로 사라졌다
        오렌지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오렌지마트가 문 닫자
        그 많은 상상 속의 오렌지들도 다 문밖으로 사라졌다
        쌩쌩복권방이 문 닫고 신나라노래방이 문 닫고 조은약국도 문 닫았다
        문 을 닫 았 다
        라는 말 곰곰 되새겨보니
        영 끝장은 아니라는 희망의 신 침이 입 안에 고인다
        그 집의 추억은 계속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인가
        식탁이 몇 개며 변기 커버의 색깔까지도 기억하는 내
        추억 속의 그 집은 오래오래 성업 중이다
        보이지 않는 문 안에서 영원히 영업을 하는 사람들
        거리에서 만난 그 얼굴들은 아직도 성업 중인 듯
        예전보다 더 하얗고 조금은 태양을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다
        
        훗날 그 집의 기억마저 문을 닫았을 때
        무거운 눈꺼풀을 모두 내린 그 집은
        그제야 영원한 잠에 빠져들게 된다


* 쿠바와 고그리는 내가 사는 동네의 맥주집과 고기집 이름인데 얼마 전에 다 문 닫았다.

[감상]
<추억 속의 그 집은 오래오래 성업 중이다>에서 마음에 온기가 돕니다. 사라져가는 것들, 그리고 잊혀져 가는 것들에게 보내는 연민과 애정 같은 것. 하나 둘 떠나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두고 간 것은 막막함일 터인데, 그 굳게 닫힌 문을 열게 하는 힘은 이렇듯 상상력에 있습니다. 시를 술술 읽어가다 보면 어느덧 제 삶의 길을 찾아 떠나야만 했던 가게 주인들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추억도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그런 추억들이 과거에서 현실을 밝게 비추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꽃피는 아버지 - 박종명 [4] 2001.04.03 3084 281
1190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1] 2001.04.03 2095 300
1189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2] 2001.04.03 3113 294
1188 봄의 퍼즐 - 한혜영 [2] 2001.04.03 2355 313
1187 나무의 내력(來歷) - 박남희 [2] 2001.04.04 2042 291
1186 낙타 - 김충규 [1] 2001.04.04 2000 288
1185 구부러진 길 저쪽 - 배용제 [1] 2001.04.06 1939 296
1184 오존 주의보 2 - 문정영 [1] 2001.04.07 1848 299
1183 넝쿨장미 - 신수현 [1] 2001.04.07 2047 332
1182 그물을 깁는 노인 - 김혜경 [1] 2001.04.09 2631 306
1181 세월의 변명 - 조숙향 [1] 2001.04.09 2479 273
1180 정기구독 목록 - 최갑수 [1] 2001.04.10 1880 280
1179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2] 2001.04.10 1801 283
1178 왕십리 - 권혁웅 [1] 2001.04.10 1842 292
1177 트렁크 - 김언희 2001.04.11 1758 332
1176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
1175 날아가세요 - 허연 2001.04.12 2172 327
1174 우울한 샹송 - 이수익 2001.04.13 1876 324
1173 찬비 내리고 - 나희덕 2001.04.14 2114 302
1172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 허수경 2001.04.16 2126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