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 이원 / 문학과지성사
PC
― 서시
'너'가 있어 호흡했던 세월의 공기를 '너'에게 다시
보낸다 내려야 할 곳을 한참 지나와버린 곳까지 끌고
와 헉헉대며 이곳에서 보낸다 끝까지 가지 못한 길의
한 모퉁이에서 놓쳐버렸던 나의 발이여 한줌의 공기여
나는 그 순간의 '나'를 눌러 그 세월을 프린트하기 시
작한다 간혹 빛바랬거나 지워진 곳들도 있다 호흡을
중단했던 곳에서는 잠깐 프린트가 중단되기도 한다 그
러나 심장이 그곳들을 기억한다 잠시 그 세월의 심장
속에 '나'를 담근다 캄캄한 한가운데로 시간의 커서가
내려가고 있다 온몸이 차다 숨이 막힌다 닿아야 할 그
곳에 닿기 전에 기어이 종료 키를 누른다 캄캄한 모니
터 화면 속으로 수평선이 무너지고 있다 그 수평선 속
의 공기인 매듭을 '너'에게 보낸다
[감상]
너와 세월에 대한 것을 PC로 비유해낸 시입니다. 상상력에서 오는 신선함이 우선 좋네요. 특히 "프린트하다"의 개념이 삶에 관한 '전송'으로 이어진다는 발상도 그렇고요. 좋은 시는 시인이 육성과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에 의한 묘사와, 정신의 조화로운 공존 속에서 태어난다는 말을 되새김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너"가 누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