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무덤 - 안명옥

2002.03.19 15:56

윤성택 조회 수:1145 추천:205

무덤 / 안명옥 / 2002 『시와시학』봄호 신인 당선작



         무덤


        섬유공장에 다니는 언니는
        제 몸에 무덤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는
        죽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언니가 제 몸 한쪽 구석에
        스스로 만든 무덤
        
        하지만 언니의 무덤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도굴되었다
        古來로부터 내려온 이름을 알 수 없는,
        언니의 무덤 속에 숨겨져 있던 각종 보석과
        매장품들은 이미 도굴되고 없다

        언니는 껍질만 남은 텅 빈 무덤에
        자신의 나이와 생각을 묻고
        유년시절의 여울물소리도 묻고,
        바람도 햇살도 묻는다

        언니는 때때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을
        무덤 속에서 추스르고
        가슴속에 출렁이던 물들을
        조용히 무덤으로 흘려보내곤 했다

        잡풀들만 무성한 이 삭막한 땅에
        언니가 들풀처럼 꿋꿋이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때때로 텅 비기도 하다가
        때로는 무언가로 가득차 있는
        신비한 무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꽃 같은 아이들은
        제 생의 처음이던 입술을 무덤에 대고
        농도 짙은 젖을 빨아들인다

        언니의 아득한 무덤 속에서는
        가끔씩
        종소리 울리고



[감상]
언니의 무덤은 어쩌면 꿈의 공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시는 섬유공장을 다니면서 꿈을 잃게 되어가는 과정을 과감하게 "도굴되었다" 라는 표현으로 비유해냅니다. 그러나 언니는 이미 청춘이, 아니 세월이 빠져나간 무덤에 유년의 풍경들을 들여놓고 있습니다. 이렇듯 이 시는 비유의 공간을 확실하게 마련한 것이 장점입니다. 어쩌면 진짜 무덤일지도 모를 상황과 병치시키면서 말이죠.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11 여주인공 - 이희중 2002.02.16 1070 173
1010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2002.02.18 1204 186
1009 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 - 최영숙 2002.02.19 1138 188
1008 귀향 - 박청호 2002.02.20 1187 195
1007 수도관은 한겨울에만 꽃을 피우고 - 심재상 2002.02.21 1133 215
1006 푸른 사막을 보고 오다 - 권현형 2002.02.22 1412 182
1005 겨울 밤에 시쓰기 - 안도현 2002.02.23 1601 181
1004 나무를 생각함 - 최갑수 2002.02.26 1295 177
1003 커브가 아름다운 여자 - 김영남 2002.03.04 1196 200
1002 그가 두고 온 빈집에선 - 이정록 2002.03.05 1219 178
1001 버리고 돌아오다 - 김소연 2002.03.06 1174 184
1000 PC - 이원 2002.03.07 1220 198
999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 이선영 2002.03.11 1151 215
998 젊은 날의 겨울강 - 최동호 2002.03.12 1152 210
997 가시 - 남진우 [1] 2002.03.14 1327 217
996 바람불던 집 - 장승진 2002.03.15 1183 200
995 안개에 꽂은 플러그 - 이수명 2002.03.16 1118 178
994 신림동 마을버스 - 최승철 2002.03.18 1151 171
» 무덤 - 안명옥 2002.03.19 1145 205
992 1984년 - 김소연 2002.03.20 1243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