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후생을 기억함> / 이성렬/ 《우이시》 2006년 3월호
내 후생을 기억함
가로수들이 참호 안에 하반신을 묻고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다
한때 물 밖으로 이주했던 유인원이 아가미를 달고 물속으로 들어가다
지구가 이틀 동안 회전을 멈추었으나 아무도 내리지 않다
모든 편지가 발신자에게로 돌아가다
문장에서 의문부호들이 사라지다
지상의 불빛이 가여워 먼 곳에서 별들이 그림자를 달기 시작하다
천사로 진화한 곤충이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이들을 찾아 붉은 징표를 심어주다
[감상]
기억이란 지난 과거를 품고 있는 것이지만 이 시는 미래조차 기억의 일부분입니다. 이런 역설을 통해 빚어내는 후생을 낯설고 독특한 풍경으로 형상화합니다. 전체를 내다보는 직관은 시인만의 미래의 징후들로서 이 시대에 대한 물음이겠지요. 과학의 '진화'나 종교의 '징표'라는 관점에서 던져주는 시사성과, 그 의미를 아우르는 문장에 긴장과 탄력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