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녹색 감정 식물 - 이제니

2011.01.24 10:37

윤성택 조회 수:1067 추천:123


《아마도 아프리카》/  이제니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 《창비시인선》321

          녹색 감정 식물

        식물이 말라죽기도 하는 밤이었다
        수풀은 슬픔을 잠식한다
        습기는 습기로 피어오른다
        많은 것들이 죽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거의 볼 수 있었다
        어두운 식물이 자라나고 있었다
        말하지 못하는 말이 있었다
        새의 깃털은 물감을 뿌린 것처럼 선명했다
        넝쿨과 넝쿨이 안간힘을 다해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가느다란 실 같은 마음이 서로를 잇고 있었다
        실을 토하는 벌레의 등을 누르자 녹색의 즙이 흘러나왔다
        어떤 죽음은 사소하게 잊혀져갔다
        가위로 오려 만든 종이인형의 그림자
        배경이었던 것들이 백지 위에서 불쑥 일어서곤 했다
        어두운 수풀의 어두운 새의 어두운 깃털이
        누군가의 얼굴이 뭉개지고 있었다
        녹색 식물의 입이 흔들리고 있었다
        녹색의 감정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릴 수 있다면 날아오를 수도 있겠지
        날아오를 수 있다면 사라질 수도 있겠지
        물과 얼음
        물과 수증기
        액체의 부피는 변하지 않는다
        영혼의 질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잘못 내디딘 한 발자국은 이미 길을 잃었다는 말이다
        이제는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다
        수풀 아래 묻혀 있던 잊혀진 기차 레일
        남색의 곤색의 녹색의 꽃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빛의 회절 속에서 진동하는 녹색
        녹색 광선이 너의 얼굴을 조각내고 있었다
        눈은 떼어 여치에게로
        입은 떼어 앵무에게로
        귀는 떼어 귀뚜라미에게로
        코는 떼어 조약돌에게로
        분별 없는 심장이 그것의 감정을 녹색으로 물들였다
        내게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수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계단은 아래로 향하는 무수한 선분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 죽어가면서 태어나고 있었다
        무언가 지워지면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감상]
식물도 감정이 있고, 영혼과 개성을 지닌 생명체입니다. 다만 우리가 식물의 감정표현을 느끼지 못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나는 그것을 거의 볼 수 있었다’면 식물과 화자와의 관계는 참으로 흥미롭게 이어지겠지요. 이 시는 이렇게 식물의 자의식과 서정을 아우르면서 끈질긴 녹색의 교감을 이뤄냅니다. 결국 식물이 방황하기도 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게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상의 오염과 부패로부터 우리를 구출하고 있는 저 밖의 식물들에게, 이기적인 나는 내게서 가장 먼 사람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71 간이역 - 김선우 [2] 2001.04.17 2218 324
1170 맑은 날 - 김선우 2001.04.18 2227 284
1169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2001.04.19 2094 292
1168 연애 - 안도현 2001.04.20 2280 282
1167 여자들 - 김유선 2001.04.21 1865 291
1166 전망 좋은 방 - 장경복 2001.04.23 1889 325
1165 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2001.04.24 1668 331
1164 벽돌이 올라가다 - 장정일 2001.04.25 1712 294
1163 펜 노동자의 일기 - 이윤택 2001.04.26 1661 321
1162 자미원민들레 - 이향지 2001.04.27 1576 291
1161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1] 2001.04.28 1759 321
1160 장화홍련 - 최두석 2001.04.30 1504 319
1159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 김중식 [1] 2001.05.02 1822 278
1158 백제탑 가는 길 - 신현림 2001.05.03 1329 252
1157 두통 - 채호기 2001.05.04 1393 242
1156 바구니 - 송찬호 2001.05.07 1406 270
1155 마포 산동네 - 이재무 2001.05.08 1694 250
1154 목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 유용주 2001.05.09 1260 255
1153 저수지 - 김충규 [1] 2001.05.10 1371 266
1152 버려진 식탁 - 이윤학 2001.05.11 1371 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