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신춘문예 당선집/ 서광일(중앙일보)/ 문학세계사
소음동 삽화
1
집 값 싼 동네에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간혹 남의 집 앞을 걷다가
무심코 창 너머를 볼 때가 있다
싱크대 틈으로 숨어드는 바퀴벌레처럼
황급히 눈을 돌리거나 딴청을 부려봐도
어느새 이 집 저 집 세간을 속속 알게 된다
어느 날 문득, 다 알고 있다는 듯
누군가 연장을 빌리러 올 때까지는 모른다
골목이라는 게 얼마나 좁은지
2
하수도 공사가 시작되었다
길의 살갗을 벗겨내고
동네 내장을 다 도려낼 작정인지
포크레인 날 끝이 유난히 서 있다
어떤 작업과도 대결하겠다는 듯
웃옷을 벗은 인부들
다 늘어난 메리야스 틈에서
낡고 오래된 살이 까맣게 솟는다
제 집 담장 안팎에서
공사의 우열을 감독하고 계획하는 입들
쉴 새 없다
일주일 전이었던가
새로 이사온 집 차로 인해
골목이 좁아지자 시비가 붙었다
늘 같은 자리에 주차하던 습관 속으로
그의 차가 불법 주차된 것이다
한치도 내줄 수 없다는 쪽으로
이웃들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그의 차는 골목 어딘가로 도망쳤다
아침이 지나도 출근하지 않는 차들
몇 대는 번호판이 없다
언젠가 두껍게 내려앉은 먼지로
썩은 물이 흐르고 냄새가 날 것 같았는데
공사 때문에 어딜 갔는지
조용하다
3
드문드문 점포 정리가 끝난 상점들
받침만 남은 간판을 무겁게 이고
빠진 잇속처럼 어둠으로 걸어 잠근 유리문
차양막 그늘로 느릿느릿 노인들이 모인다
장기판 주위에 둘러앉아
시간에다 외통을 걸고 싶은 것일까
한 수 놓기가 무섭게
저마다 세월만큼씩 목울대를 세운다
다른 수를 놓기엔
덧댄 곳이 너무 많은 이 도시의 골목
까르르 전봇대들 돌며
술래를 잡는 아이들
날이 저물면 골목 여기저기
제 자식의 이름을 불러대는 어둠
여긴 없다는 듯 불 밝히는 간판들
순식간에 골목 가득 소리가 익어간다
몇 번인가 나도
그 냄새에 끼어든 적이 있다
짐승의 내장이나 뼈 심지어 발 따위가
용케 손맛 좋은 아낙을 만난 것이다
당연히 소주 한 잔 걸치다 보면
사는 게 그래도 좋은 건
안주에 넣은 무슨무슨 고기보다는
양념처럼 잘 버물러진 사람들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
4
집을 나서는 길에
자꾸 무슨 소리가 들린다
날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불러낸 소리 같기도 하고
하루가 다르게 시끄럽다
[감상]
소시민의 이야기, 약간 수필투이긴 하지만 한 눈에 선합니다. 가끔 이런식으로 내 사는 곳을 그려볼까도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