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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2001.06.12 12:09

윤성택 조회 수:1618 추천:267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 문학동네





                 바닷가 우체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감상]
실은 안도현 시인의 시편들을 좋아합니다. 너무 편해서 탈이기도 하지만, 그 편함이 나에겐 중요한 덕목으로 와 닿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닷가 우체국 모습 잔잔하게 와 닿습니다. "일포스티노" 영화가 생각나기도 하고, 가끔씩 잠언처럼 읊조리는 문구들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치열해야 된다고, 절대로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하지만 때로는 바닷가 우체국처럼 쉬고 싶습니다. 기형도처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떠나갔고 또 그렇게 될 것이지만, 이렇게 우체국처럼 대책없이 기다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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