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2001.07.23 15:07

윤성택 조회 수:1323 추천:302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 84 경향신춘 당선작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닥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곤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감상]
시인의 상상력이 끝까지 활기차게 내달립니다.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막연한 꿈이 아니라, 정말 고양이에게로 옮겨간 시인의 삶입니다.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비록 하찮다할지라도 그 꿈속에는 이렇듯 자잘한 희망이 숨어 있습니다. 꿈꿀 수 있기에 詩는 매혹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11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694 322
1110 카페 리치에서 - 곽윤석 [3] 2001.07.18 1570 304
1109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2001.07.19 1574 291
1108 온라인 - 이복희 2001.07.20 1361 306
»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2001.07.23 1323 302
1106 푸른 밤 - 나희덕 [1] 2001.07.27 1900 268
1105 낡은 의자 - 김기택 [1] 2001.07.30 1574 248
1104 나는 시간을 만든다 - 박상순 2001.07.31 1437 255
1103 기차는 간다 - 허수경 [2] 2001.08.01 1568 236
1102 나무는 뿌리로 다시 산다 - 이솔 2001.08.02 1359 242
1101 울고 있는 아이 - 배용제 2001.08.03 1494 254
110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2001.08.04 1241 245
1099 소주 - 최영철 2001.08.06 1556 240
1098 섬 - 조영민 [6] 2001.08.07 2047 256
1097 무인 통신 - 김행숙 2001.08.08 1425 262
1096 편지 - 이성복 2001.08.09 2481 271
1095 Y를 위하여 - 최승자 2001.08.10 1700 265
1094 빗소리 듣는 동안 - 안도현 2001.08.13 1762 235
1093 어느 날 문득 - 김규린 2001.08.14 1779 232
1092 내 마음의 풍차 - 진수미 2001.08.16 1717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