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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 - 김규진

2002.11.08 15:40

윤성택 조회 수:1060 추천:170

산촌/ 김규진/ 『문학나무』(2002.봄호)




        산촌(山村)

                        - 진안(鎭安)에서


        까마득한 산촌에
        목판화(木版畵) 같은 밤이 온다.
        밤이 되면 모든 길들은 돌아간다.
        어떤 길은 마을을 끼고 돌아 천천히 골짜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들어가 낙엽을 덮어 눕고,
        어떤 길은 생선 몇 토막 바삐 흔들며 게딱지 엎드린 골목으로 사라진다.
        어둠보다 늦게
        고단한 길 하나는 황토빛 하루를 끌고 개울에서 괭이를 씻는다.
        네온 아래 헤매임 없는 곳.
        어둠이 오면 모든 길들은 아침에 걸어나왔던 제자리로 돌아간다.
        길섶의 들꽃만 저희들끼리 남겨져
        시린 어깨를 부빈다.
        불이 켜지고, 달각달각 숟가락 소리 들리고
        아홉시 뉴스의 쌀값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어떤 길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 길들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린다.
        ―오늘 오후 산기슭에 묻힌 늙고 구부러진 길 하나도 있었다.

        서편에는 사과조각 같은 하현달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산등성이.

        하나둘씩 불빛 가라앉고
        어떤 길은 한숨으로 홑이불 같은 어둠을 눈썹까지 끌어올리고
        어떤 길은 슬금 다가오는 술 취한 손을 팽하니 뿌리치며 돌아눕고
        어떤 길은 옹이진 다른 길을 껴안으며
        새삼 불룩해진 아랫배를 쓰다듬는다.
        ―이 길은 어디를 걸어갈까.
        이 길도 나처럼 힘겨울까.
        슬픔도 기쁨도 하나인 듯
        어둠 속에서는 결국 한 색깔이 되고
        부다다다다…….
        갑자기 광포한 *다다이즘처럼
        낄낄대는 파란 길들이 어둠을 가르며 순식간에 지나간다.
        황급히 갈라진 어둠을 뒤채우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꽁꽁한 어둠.
        문득 오늘 아무데도 가지 않은 길 하나가 부시럭 일어나
        길고 깜박이는 불 하나를 밝힌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양팔을 뻗는 별자리들
        손 놓친 별 하나 사금파리처럼 밤하늘을 긋고.



*다다이즘(dadaisme) : '다다'는 '아무 뜻이 없다'는 말. 1차 대전 말 모든 가치와 질서를 부정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운동.




[감상]
산촌에서 보이는 길에 관한 명상쯤으로 읽히네요.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시적 긴장이 인상적입니다. 새롭게, 새롭게 하나 하나 읽힙니다. 이제쯤 이 시에 나 있는 길 하나에 접어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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