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바닷가 저녁빛 - 박형준

2009.03.03 22:44

윤성택 조회 수:1317 추천:104

  
「바닷가 저녁빛」 / 박형준 (1991년 『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 《시와반시》2009년 봄호


        바닷가 저녁빛

        사물 속에 빛나는 고통처럼
        또 저녁이 온다
        버드나무 꽃가루가 자꾸 날아와
        다래끼를 나게 하는 바다

        선창가 외진 술집
        금간 담벼락 밑에 핀 질경이꽃처럼
        먼지투성이의 삶을
        눈빛으로나마 바다에 빠뜨리며 걷는다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한 개의 초점만 남은 눈먼 시계공
        수평선에 잔해를 이루며 노을은
        시간의 땔감들을 한단씩 태우며 저문다

        새살이 돋아나는 통증인가
        부서진 초침과 분침들
        부드러운 상처 속에서 뿜어져나오는 별들로
        또 하나의 성좌를 이룬다
        저 물속에서 피는 빛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

        
[감상]
저물녘 서해바다를 오래도록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백사장 끝 담벼락, 가뭇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기대어 먹먹하게, 다만 눈동자를 멍들게 하는 저녁해를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이 시는 눈(目)이 겪는 고통, 씀벅 감았다 뜨는 빛의 여운을 간결한 필치로 물들입니다. 마치 서서히 어두워지는 페이드 아웃(fade out)처럼 영화적 이미지가 선명하다고 할까요.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한 개의 초점만 남은 눈먼 시계공’. 그해 서해바다의 저녁놀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어떤 기대도 찾아오지 않던, 스물 몇 해 그 막막한 대천 앞바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내 안에서 멀어져가던.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1 2009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09.01.10 1907 126
110 꽃*천상의 악기*표범 - 전봉건 2009.01.21 1201 124
109 빗방울 꽃 - 문신 2009.02.09 1155 108
108 꽃 피는 시간 - 정끝별 2009.02.10 1484 97
107 폭주족의 고백 - 장승진 [1] 2009.02.12 992 111
106 병(病)에 대하여 - 여태천 2009.02.13 1110 94
105 풀잎처럼 - 박완호 2009.02.14 1270 101
104 기록들 - 윤영림 2009.02.16 1061 114
103 봄 - 고경숙 2009.02.17 1661 94
102 꽃눈이 번져 - 고영민 2009.02.28 1240 99
101 강 건너 불빛 - 이덕규 2009.03.02 1107 101
» 바닷가 저녁빛 - 박형준 2009.03.03 1317 104
99 장미 - 박설희 2009.03.09 1737 98
98 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 김기택 2009.03.13 1231 108
97 소각장 근처 - 장성혜 2009.03.18 1047 110
96 촛불 - 류인서 2009.03.23 1464 110
95 3월 - 최준 2009.04.01 1244 126
94 이 골목의 저 끝 - 정은기 2009.04.09 1782 123
93 요긴한 가방 - 천수호 2009.04.15 1473 120
92 검은 혀 - 김산옥 2009.04.21 1456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