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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 김기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유심》 2009년 1~2월호
  
          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죽은 지 여러 날 지난 그의 집으로
          청구서가 온다 책이 온다 전화가 온다

          지금은 죽었으므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반송되지 않는다
          눈 없고 발 없는 우편물들이
          바퀴로 발을 만들고 우편번호로 눈을 만들어 정확하게 달려온다
          받을 사람 없다고 말할 입이 없어서
          그냥 쌓인다 누군가가 뜯어봐 주기를 죽도록 기다리면서
          무작정 쌓이기만 한다

          말을 사정(射精)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혀들은
          발육이 잘된 성욕을 참을 수 없어 꾸역꾸역 백지를 채우고
          종이들은 제지공장에서 생산되자마자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책이 된다 서류양식이 된다
          백골징포(白骨徵布)를 징수하던 조직적인 끈기가 글자들을 실어나른다

          아무리 많이 쌓여도 반송할 줄 모르는
          바보 햇빛과 바보 바람이
          한가롭게 우편물 위를 어정거리고 있다

        
[감상]
이사하고 몇 달이 지나도 전주인 앞으로 우편물이 계속 쌓입니다. 반송함에 넣고 넣어도 비닐 면에 인쇄체로 찍혀진 전주인 이름이 월말이면 계속 배달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를 이름 앞으로 끈질기게 청구해 오는 자본주의의 근성을 느낍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죽은 후에도 찾아오는 끔찍한 청구서들을. 종이는, 아니 나무는, 더 나아가 자연은 그렇게 ‘제지공장에서 생산되자마자’ 물질문명의 수단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마치 ‘바보 햇빛과 바보 바람’처럼 말이지요. 언젠가 아주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여행을 다녀왔을 때, 그리고 내가 당신들에게서 잊혀졌다고 생각할 때, 쌓여 있던 청구서들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면서 울컥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게 죽지 않고 살아서 내게로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기분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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