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1월의 폭설 - 홍신선

2003.02.06 11:33

윤성택 조회 수:949 추천:182

「1월의 폭설」/ 홍신선/ 『문학과창작』2003년 2월호



        1월의 폭설



        대형서점에
        톤백으로 쏟아져 나와 쌓인
        수천톤 쓰레기들 저 생각의 잡동사니들
        때 맞춰 시간의 양각풍(羊角風)에 쓸려내려와
        텅빈 담론의 계곡이나
        감각의 깊은 하수구에 꽉꽉 쌓이고 처박힌
        이 말의 폐기물들
        분리수거하듯 망각 속에 내용별로 곧 입고시키지만
        부서진 고문서 활자들 주소지를 바꾸지만
        깡마른 양어깨 속에
        묻힌 유골들 발굴한듯 빗장뼈를 드러내는,
        일제히 나무들이 퉁퉁 부은 몸피마다 검은 *촉루를 감추고 섰다
        썩음썩음한 공기 속에
        오늘은 또 몇 ℓ짜리
        쓰레기 봉투들을 하늘은 새로 내다놓는가

        나는 나를 내다버리는가


[감상]
마지막 연이 어느 산에서 울리는 쩌렁쩌렁한 메아리 같습니다. 대형서점에 쌓여 있다가 팔리지 않아 버려지는 책들을 이 시는 과감하게 '쓰레기들'이나 '말의 폐기물'로 규정짓습니다. 시인은 아마 1월 폭설이 내리는 길가에서 책 묶음들이 밖에 내 놓여진 풍경을 목도했을 것입니다. 한번도 펼쳐보지 못한 누렇게 색이 바랜 겹겹의 페이지들이 눈발에 젖어 '퉁퉁 부은 몸피'가 되었고, 그 안 살이 전부 썩고 남은 송장의 뼈야말로 '활자'라는 직관을 보여줍니다. 이 시가 좋은 이유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단박에 내지르듯 '나는 나를 내다버리는가'라는 시적 대상과의 밀착입니다. 어쩌면 시인이 써왔던 시들이 그 버려질 묶음 안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풍경에도 詩로 발견해낼 줄 아는 시인의 눈에 감복합니다.

*촉루 : 인터넷상에는 이 한자가 써지지 않는군요. 뜻은 살이 전부 썩고 남은 송장의 뼈, 즉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51 자동카메라 - 김지향 2010.02.03 1437 109
50 저니 맨 - 김학중 2010.02.04 1480 130
49 혀 - 장옥관 2010.02.12 1758 147
48 나는 기억하고 있다 - 최승자 2010.02.18 2487 192
47 근황 - 정병근 2010.12.31 756 81
46 얼음 이파리 - 손택수 2011.01.01 698 61
45 가방 - 유미애 2011.01.04 711 80
44 2011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11.01.04 1056 71
43 조난 - 윤의섭 2011.01.05 694 75
42 강변 여인숙 2 - 권혁웅 2011.01.06 727 72
41 연리지 - 박소원 [1] 2011.01.07 939 112
40 와이셔츠 - 손순미 2011.01.10 752 69
39 바다의 등 - 차주일 2011.01.11 807 67
38 브래지어를 풀고 - 김나영 2011.01.12 1087 78
37 그믐 - 김왕노 2011.01.13 782 75
36 내 그림자 - 김형미 2011.01.14 1014 84
35 빙점 - 하린 2011.01.15 941 81
34 따뜻한 마음 - 김행숙 2011.01.17 1630 95
33 무가지 - 문정영 2011.01.18 924 103
32 밤의 편의점 - 권지숙 2011.01.20 1077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