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나는 시간을 만든다 - 박상순

2001.07.31 14:04

윤성택 조회 수:1437 추천:255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 박상순 / 세계사




나는 시간을 만든다



  나는 시간을 만든다. 허리를 만들고 앞가슴을 만들고, 머리를 만든다. 나는 그녀를 만들었다.
진흙으로 뭉쳐진  그녀를 다 만든 뒤 두 손을 털며 문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흙반죽 어지러이
흩어진 작업대 위에서 쉬임없이 허둥댄다.

  그녀는 내가 두고 온 크림빵을 먹으려고 애쓴다. 받침대에 붙박인 한쪽 발을 떼어내려 한다.
그사이, 내가 작업대 밑에 놓고 온 사진들, 내 사진들을 내려다보며, 사진 속에 앉아 있는 나를
부른다.

  그녀는 사진 속에서 나를 본다. 바다를 본다.  들길을 보고,  황혼을 확인하고,  내가 빠져나온
작업실에서 마침내 빠져나와 내 그림자를 앞질러 간다.

  나는 시간의 꿈 밖에 앉아, 작업실 밖 빈터에 앉아, 짐차를 기다린다. 멀리 갔던 그녀가 짐차를
타고 내게로 온다. 내 작업실을 싣는다. 작업대를 싣고 간다. 그녀의 차바퀴가 픽픽댄다. 바람이
샌다.

  나만 홀로 짐차에서 내린다.  바람 빠진 그녀의 짐차가 내 작업대만 싣고 간다. 나는 사진을 찍
는다. 시간을 기록한다. 뿌리뽑힌 집터에 앉아 지붕을 생각한다. 별을 만든다. 작업대를 만든다.
별 속에 만든다. 진흙을 만든다. 작업대가 진흙으로 나를 만든다.


[감상]
몽환적인 분위기의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의 가장 큰 포인트는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꿈이든 현실이든 이 시는 장자의 나비처럼 끊임없는 메비우스의 띠를 형성하면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산문시일 경우 단문으로 해야한다는 정통기법을 잘 살린 점도 좋고요, 그녀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 도입부와, 마지막 작업대가 화자를 만드는 환치 또한 인상적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91 오지 않네, 모든 것들 - 함성호 2001.08.17 1527 216
1090 선천성 그리움 - 함민복 2001.08.20 1451 207
1089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 - 김충규 2001.08.21 1180 195
1088 아카시아 나무 그늘에 오면 - 김혜경 2001.08.22 1369 206
1087 쓸쓸한 날에 - 강윤후 2001.08.23 1651 211
1086 하지 - 조창환 2001.08.24 1259 249
1085 나에게 사랑이란 - 정일근 2001.08.27 1715 218
1084 겨울삽화2 - 천서봉 2001.08.28 1454 191
1083 세상 먼 바깥쪽에서 - 장영수 2001.08.29 1267 212
1082 그런 것이 아니다 - 김지혜 [2] 2001.08.30 1535 223
1081 가을에는 - 최영미 [3] 2001.08.31 2431 235
1080 반성 16 - 김영승 2001.09.03 1273 203
1079 목도장집이 있는 길목 - 최승철 2001.09.04 1242 178
1078 고별 - 김종해 2001.09.05 1212 204
1077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7] 2001.09.07 1411 179
1076 그믐밤 - 신혜정 2001.09.10 1352 210
1075 첫사랑 - 진은영 [2] 2001.09.11 1794 190
1074 비망록 - 김경미 2001.09.12 1375 201
1073 등꽃 - 김형미 2001.09.13 1509 193
1072 가장 환한 불꽃 - 유하 2001.09.17 1723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