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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장집이 있는 길목 - 최승철

2001.09.04 10:51

윤성택 조회 수:1242 추천:178


『제3회 사이버신춘문예 작품집』당선작 / 최승철 / 유니프레스

        목도장집이 있는 길목

        PC방 아래 미닫이문을 열면 목도장 파는
        노인이 오래된 금성 라디오에 귀 대고 앉아 있다
        손마디를 조심하며 돋보기 안경을 눈에 끼운다
        맞은 편 길에서 포크레인이 하수도관을 올려
        땅에 묻는다 내 이름은 많은 입술을 떠돌았지만
        길을 찾지 못 했다 목도장의 길 위에서 나는
        반듯해 질 수 있을까 노인의 조각칼이 예리하게
        목도장을 파고든다 첨단 시대의 급소를 겨누듯
        노인의 눈이 예민하게 움직인다 당구장
        신축공사 중인 건물에서 시멘트 조각이 떨어진다
        조각칼이 움직인다 안전제일 모를 쓴 인부가
        아슬하게 창턱을 넘나든다 목도장 위의 목설木屑을
        노인이 후 분다 녹색 안전망에 걸린 철골 조각들
        뚝뚝 끊어진 전기줄들 목도장 파는 노인의
        손길이 타이르듯 날을 세워 내 이름을 다듬는다
        포크레인이 퉁퉁 흙더미를 다진다 노인은
        목도장 위에 얼마나 많은 이름의 길들을 묻었을까
        진열대의 촘촘한 먼지들 위로 햇빛이 쏟아지고
        나는 인주를 묻혀 이력서 위에 도장을 찍는다
        노인의 주름진 이마에 익숙한 허리춤,
        돌아보면 노인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과
        건물이 들어선 듯 햇빛 파여 있다

[감상]
PC방과 구식 금성 라디오의 접목, 이것은 사이버라는 화두 아래 화해될 수 있는 한 접점으로 느껴집니다. 세대와 세대와의 갈등이 느껴지는 요즘에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 목도장을 파야하는 자본주의의 피해자가 아니었던가요. 실패한 사람만이 값싼 목도장에 제 이름을 새길지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우선 단조로운 패턴의 서술이 아니라, 여러 복선을 내포한 서술 방식을 택한 데에 장점이 있습니다. 하수도관을 묻는 작업, 노인이 목도장을 파는 작업은 각기 다른 작업으로 시작하여 결미에 이르러 하나의 동질화된 작품으로 재탄생 합니다. "목도장 위에 얼마나 많은 이름의 길들을 묻었을까"라는 이 물음은 시인의 재해석의 시각이며 또한 새로운 발견에 해당합니다. 이제 길에는 관이 묻히고, 그곳에 "햇빛이 파여 있다"는 발언으로 인하여 이 시는 제법 단단한 시적 완성도를 유지합니다.
사이버신춘문예라는 특성상 사이버적인 주제를 요구하리란 당초의 생각과는 달리, 현실과의 화해에 주안점을 둔 듯 합니다. PC방과 금성 라디오, 이 문명의 부산물들은 시대는 다를지언정 하나의 문화를 이끌어 가는 주요한 수단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간만에 눈을 즐겁게 한 이 시를 보며, 내가 함부로 만들고 잃어버렸던 목도장들이 떠올랐던 것은 왜일까요. 심사위원이었던 시인 신경림은 그러한 노인의 눈으로 부박한 문명의 흐름을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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