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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 - 강해림

2006.07.07 10:43

윤성택 조회 수:1882 추천:249

<책들> / 강해림/ 《현대시》2006년 7월호


  책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는 오후, 북회귀선은 없다 오랫동안 외설로 낙인찍힌, 금서는 외롭다 어두컴컴한 독방에서 수음하는 문장들

  껍질을 벗기고 푹푹 삶은 몸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고행을 묵묵히 견뎌준 나무들 헌신이 없었다면, 그리하여 해탈한 표정 눈부신 지구상의 책들을 모조리 수거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 버린다면

  오래 된 책 속에는 시간의 자궁 냄새가 난다 가령, 고서적이나 족보 같은 삭아 한쪽 귀퉁이가 누렇게 변질되거나 만지면 바스러질 듯, 계보를 알 수 없는 시간의 알을 까고 있는 얼룩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좋겠다 서로 등기대고 앉아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심연보다 더 깊은 심연에 낚싯대 하나 달랑 드리워놓고 권태라는 이름의 안경 낀 몽상가들 흉내나 내며 늙어갈 테니까

  다시 북회귀선으로 돌아와, 책의 내부에도 지퍼가 있다면 고래뱃속 같은 북회귀선 안에 갇혀 한 사나흘 캄캄해지고 싶다 캄캄해진다는 것만큼 황홀한 성적 묘사가 있을까 세상의 위대한 책들 앞에선 더더욱,

  관념이 짜주는 파리한 즙이 흘린 문장을 따라가려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책의 고문, 진리를 살해한 자와 공범이 되고 낙오하지 않으려면 늘 집중력이 문제다

  그러고 보니 내 독서목록을 기록하던 만년필도 꽤나 관념적으로 생겼다 이제 막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여인의 복부처럼,
  그리운 북회귀선을 기다리며


[감상]
책장을 넘기다 흠칫할 정도로 치열함이 놀랍습니다. 분방하게 뻗어가는 상상력은 갖은 빛깔의 실로 탄탄하게 매듭지어 놓은 자수처럼 강하고 세밀합니다. 책 한 권이 이토록 많은 풍경을 거느릴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데, 마치 <북회귀선>의 내용처럼 자유롭다고 할까요. 독서라는 것이 이성적 체계의 습득의 과정이라면 시쓰기는 이렇듯 직관으로 균형이 잡힌 예지적 성격이 짙습니다. <관념이 짜주는 파리한 즙이 흘린 문장>을 보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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