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뢴트겐의 정원 - 권오영

2008.09.16 16:25

윤성택 조회 수:1200 추천:103

「뢴트겐의 정원」 / 권오영 ( 2008년『시와반시』로 등단) / 『시와반시』2008년 여름호 당선작 中


        뢴트겐의 정원

        부서지고 금간 곳을 들여다보며
        그는 또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
        그가 하나의 세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살과 뼈, 그 사이로 여전히 흐르는 피는
        x선 사진 속에서 어둡다
        어둠 속에서 뼈의 줄기들이 빛난다
        빛나는 것들이 환하게 길을 열어 보인다
        부러진 뼈마디, 쇠심 박힌 척추,
        피맺힌 갈비뼈에서 자라는 꽃들
        시속 백사십 킬로의 자동차에서 튕겨져 나온 사내,
        몸의 흔적은 무성했다
        살점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잎사귀들,
        진흙 속을 헤집고 나온 듯한 푸른 꽃들,
        살갗을 뚫고 날아갈 것만 같은 은빛 나비들,
        잠에서 깨어나는 애벌레들, 눈이 부시게
        오랫동안 몸속에 불이 켜져 있다
        부러진 뼈마디에 뿌린 씨앗들이 꽃을 피운다
        살아있는 시체의 얼굴을 한
        핏빛 냄새를 풍기는 붉은 정원
        형광 불빛 아래서 살아나는 낮은 신음들을
        하나씩 벽에 건다
        벽에 걸린 채 살아나는 신음들을 만지며
        그가 달아난 세계를 본다


[감상]
x선 필름 사진은 대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의 제 안 모습일 경우가 많습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의학적 메시지가 필요치 않으니까요. 뢴트겐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 시에서처럼 필름 속 명암들이 푸른빛의 다른 세계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그 사람의 고통과 절망을 짐작하는 x선 필름이 ‘몸속에 불이 켜져’  ‘뼈에서 자라는 꽃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제 안에 정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의 간극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광합성 하는 206개 뼈의 정원 말입니다.


  

* 화가 한기창

인간의 뼈가 찍힌 섬뜩하고 엽기적인 필름을 오려 생명을 상징하는 한포기 화초를 만들어내고, 빛을 발하는 라이트박스 위에 붙여 탄생한 것이 '뢴트겐의 정원' 연작이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91 오지 않네, 모든 것들 - 함성호 2001.08.17 1527 216
1090 선천성 그리움 - 함민복 2001.08.20 1451 207
1089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 - 김충규 2001.08.21 1180 195
1088 아카시아 나무 그늘에 오면 - 김혜경 2001.08.22 1369 206
1087 쓸쓸한 날에 - 강윤후 2001.08.23 1651 211
1086 하지 - 조창환 2001.08.24 1259 249
1085 나에게 사랑이란 - 정일근 2001.08.27 1715 218
1084 겨울삽화2 - 천서봉 2001.08.28 1454 191
1083 세상 먼 바깥쪽에서 - 장영수 2001.08.29 1267 212
1082 그런 것이 아니다 - 김지혜 [2] 2001.08.30 1535 223
1081 가을에는 - 최영미 [3] 2001.08.31 2431 235
1080 반성 16 - 김영승 2001.09.03 1273 203
1079 목도장집이 있는 길목 - 최승철 2001.09.04 1242 178
1078 고별 - 김종해 2001.09.05 1212 204
1077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7] 2001.09.07 1411 179
1076 그믐밤 - 신혜정 2001.09.10 1352 210
1075 첫사랑 - 진은영 [2] 2001.09.11 1794 190
1074 비망록 - 김경미 2001.09.12 1375 201
1073 등꽃 - 김형미 2001.09.13 1509 193
1072 가장 환한 불꽃 - 유하 2001.09.17 1723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