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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 박정대

2001.09.24 15:22

윤성택 조회 수:1557 추천:196

『단편들』/ 박정대 / 세계사

        거리에서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어,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
        끼고 있었어.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어요,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어요.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지,  명동엘 갔었
        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지.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네,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발성연습 좀 해
        봤어요).
  
                       나는 티브이를 끄고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더이상 쓰레기를 볼 수 없다고
                       더이상 힘이 없다고
                       나는 거의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고
                       그러나 당신은 잊지 않았다고
                       전화가 와서 내가 일어나려 했다고
                       옷을 입고 나갔다, 아니 뛰어나갔다고
                       그리고 나는 아프다고 피곤하다고,
                       그리고 이 밤을 자지 못했다고 말이에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날씨가 좋아요 사흘째나 비가 와요
                      비록 라디오에서 그늘도 더운 날씨가
                       되겠다고 예보하지만 하긴 내가 앉아 있는
                       집 안 그늘은 아직 마르고 따스해요
                       아직이라는 것이 두려워요
                       시간도 빨리 흘러요 하루는 밥 먹고
                       삼 일은 술 마셔요
                       창 밖에 비가 오지만 재미있게 살아요
                       오디오가 고장나서 조용한 방에 앉아 있어도
                       기분이 좋기만 해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창 밖에는 공사중이에요
                       크레인이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 옆의 레스토랑이 5년째 휴업해요
                       책상 위에는 병이 있고 병 안에는 튤립이 있어요
                       창턱에는 컵이 있어요
                       이렇게 해가 지고 인생이 흘러가요
                       참으로 운이 좋지 않아요
                       하지만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운 좋은 날이 오겠지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네,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
           끼고 있었네. 어느 죽은 가수의 노래가, 여름이라는 노래가 깃발처럼 나
           부끼고 있었네. 너무 가까운 거리가 우리를 안심시켰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불안이었네. 참으로 많은  비밀들이 휘청거리며 나부끼고  있었네.
           가수의 노래가 천 개의 귀를 흔들고 있었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영혼
           이 천 개의 추억을 마구 흔들고  있었네. 마침표가 없는 걸음들이 끊임
           없이 쉼표처럼 뒤뚱거리며 걷고 있었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거리에서, 그 거리에서 염소처럼 나는 담배만 피워대고


[감상]
가요처럼 시가 읽힙니다. 그 능청스러움은 1연의 "발성연습 좀 해 봤어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내용 또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화자의 쓸쓸한 모습도 느껴지고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후렴구처럼 되뇌이게 되는 이 문장으로 말미암아 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율됩니다. 가끔 내가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렸던 노래의 가사가 놀랍게도 지금의 내가 가장 절실한 마음의 심중이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화들짝 놀라, 가사를 더듬어본 적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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