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손전등을 든 풍경 - 박경원

2001.11.14 10:52

윤성택 조회 수:1184 추천:180

시멘트 정원 / 박경원/ 민음사 (오늘의 작가상)






        손전등을 든 풍경



        사람은 보이지 않고 전등을 쥔 손만이 빼꼼이 비친다
        어느 이름 모를 세월을 더듬는 듯한 저 낡고 허름한 불빛
        저글저글
        자갈들을 이끌고 오는 묵직한 움직임으로 보아
        저쪽은 이미 온 길을 가고 있거나 간 길을 오고 있음이 분명하다
        손전등이 뚫어놓은 속을 묵묵히,
        돌멩이들의 어눌한 부위를 뻔히 알 듯
        어디에선가 딱 끊어진 불빛의 절벽을 밀어내며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가설 극장에서 처음 본 영사기 불빛 같은 것
        필시, 몇십 년 전의 장막 속에 나를 몰아넣을 것처럼 불빛의 절벽
        그 끄트머리까지 나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마에 침을 바르면 졸음이 사라진다는
        흑백 시절의 알 듯 말 듯한 미신의 한쪽을 환히 비추며
        몇십 년 전의 내 안, 미로 같은 속으로 날벌레들을 밀면서 온다

        손전등이 지나치고 헛기침이 지나치고
        문득 뒤돌아보니 노인의 손엔
        날벌레를 가득 담은 맑은 불빛통 하나 쥐어져 있었다.




[감상]
이 시는 손전등에 비친 풍경들을 통해, 지나온 삶에 대한 것들을 되돌아보는 시입니다. 우선 시의 틀이 견고한 것이 좋습니다. 일테면 "어느 이름 모를 세월을 더듬는 듯한 저 낡고 허름한 불빛"에서 볼 수 있듯이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공간을 명징하게 확보했다는 것이겠지요. 또한 그것이 노인의 손전등으로 마무리지음으로써 세월의 흐름과, 거기에서 "맑은"으로 이어지는 메타포를 비끌어냈다는 점이 출중합니다. 평범하지 않은 시선 길러내기, 이것이 요즘 시들의 화두일 것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71 캣츠아이 13 - 노혜경 2001.09.18 1298 224
1070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이원 [1] 2001.09.19 1434 201
1069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 송찬호 2001.09.20 1228 189
1068 품을 줄이게 - 김춘수 2001.09.21 1196 187
1067 헌 돈이 부푸는 이유 - 채향옥 [1] 2001.09.22 1318 189
1066 거리에서 - 박정대 2001.09.24 1557 196
1065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2001.09.25 1627 206
1064 정동진 - 이창호 2001.09.26 1511 224
1063 가을산 - 안도현 2001.09.27 2815 286
1062 장지 - 박판식 2001.10.09 1448 247
1061 聖 - 황학주 2001.10.18 1310 250
1060 어떤 그리움을 타고 너에게로 갈까 - 김경진 2001.10.19 2026 202
1059 나무기저귀 - 이정록 2001.10.23 1204 203
1058 반지 - 박상수 2001.10.26 1425 191
1057 태양과의 통화 - 이수명 [2] 2001.10.29 1304 206
1056 죽도록 사랑해서 - 김승희 2001.10.31 1703 212
1055 경계1 - 문정영 2001.11.02 1164 181
1054 12월의 숲 - 황지우 [3] 2001.11.07 1598 203
1053 미탄에서 영월사이 - 박세현 2001.11.08 1099 188
» 손전등을 든 풍경 - 박경원 2001.11.14 1184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