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비냉장고 / 김중일 /2002동아일보 詩당선작
가문비냉장고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잔뜩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갸르릉거린다 푸른 털은 안테나처럼 사위를 잡아당긴다 수신되는 이름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 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열고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감상]
가령 뒤뜰에 가문비나무와 냉장고가 있다고 칩시다. 그 두 사물을 놓고 물어봅니다. 둘 사이가 어떤 것 같은지, 어떻게 하면 둘 사이가 흥미진진한 관계가 될까. 이것은 다시 상상력으로 옮겨가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시는 경직된 상식을 깨고, 새로운 시적 모색으로 이끕니다. 상식은 일상의 틀을 낳고 그 틀은 우리의 사고를 가두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 시는 상식을 틀을 깨고 상상력과 비유, 그리고 이미지 등이 잘 어울린 시입니다. 신춘문예 중 신선하고 참신한 작품에 속합니다.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상상력이 아쉬운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