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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어둠 - 이경임

2002.01.17 11:30

윤성택 조회 수:1199 추천:202

『부드러운 감옥』 / 이경임 / 문학과 지성사



  


               숨쉬는 어둠          

                        - 요나에게 2


                1
        알전구 하나 켜지지 않은
        세기말의 지루한 터널 속을
        거대한 물고기의 검은 내장 속을
        나는 터벅터벅 걸어간다
        이곳 어딘가에도 출구가 있을까
        때로 어둠의 하품 소리와 함께
        가는 빛살들의 춤과
        바람이 살포하는 바다새의 날개 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 물고기의 뼈들은
        고사목처럼 황량하다
        한때 이 끈적끈적한 유선형의 어둠은
        날카로운 가시들의 숲이었으리
        검붉은 어둠의 벽을 더듬을 때마다
        다족류의 슬픔들이 우우 발을 뻗는다
        끊임없이 나를 탐하며
        어둠의 벽에 비릿한 슬픔의 문신을 새긴다
        아, 나는 정교하게 얽혀 있는
        이 어둠으로부터 폐기되고 싶다


                2
        구부러진 길을 따라
        내 욕망의 세포들이 표류한다
        보이지 않는 촉수를 향해
        절망의 촉수들을 일제히 곤두세우며
        꿈의 부표들을 더듬거린다
        무엇일까 나의 몸에서 발산되는
        이 야광의 두려움은
        다시 어둠의 하품소리가 들린다
        나는 끊임없이 발작한다
        발작할 때마다 내 안에 켜지는
        희미한 빛의 목소리
        어둠 속에서 나는
        간신히 숨을 쉬기 시작한다



[감상]
요나는 바다 속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을 지내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성경 속의 인물입니다. 이 시가 좋은 이유는 "요나"라는 인물을 통해 시의 상상력을 드러낸 데에 있습니다. 어찌보면 관념적일 수도 있는 "어둠"을 한땀한땀 소묘해내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시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둠과 죽음에 노출된 자아의 황량한 모습이랄까요. "추억은 마침표를 찍는 문장이다/ 추억 속의 詩는/ 마침표를 찍은 미라이다/ 아름답지만 읽히지 않는/ 장식장 속의 호화 장정본이다// 아직은 추억 속으로 도망치고 싶지 않다"라는 시인의 자서도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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