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손택수 / 98년 한국일보 신춘당선작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감상]
6개월 동안 백수로 버티면서 詩만 써보겠다던 아는 형의 집은 금호동입니다. 언덕이 유난히 높아 그리 높은 곳에 집이 있는 사람들은 분명 전생에 새가 아니었을까 싶을, 골목과 골목이 서로 어깨를 주고받으며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만 이어지는, 도시의 것들은 죄다 전깃줄로 그물질될 것 같은, 그런 곳입니다. 이 시는 그런 밤 떠오르는 풍경일까요. 벽돌에게, 눈사람에게, 이 시는 희망이란 어떤 것인가를 잔잔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와 연애하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