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달팽이들> / 문성해/ 《열린시학》 2007년 봄호
민달팽이들
지하 사우나 앞을 지나는데
환풍기에서 훅 끼쳐 나오는 열기, 살 냄새들
지금 내가 밟고 선 깊고 깊은 땅 속 나라에
벌거숭이들이 버글버글하다는 상상을 해본다
헬스에서 PC방에서 식당까지
그곳에는 없는 게 없다
아침부터 한밤까지 내처 사는 여편네들도 있다
지상은 이제 피곤한 싸움터일 뿐,
그곳은
수술자국 남겨진 아랫배를 다 드러내어도
부끄럽지 않은 해방터가 된지 오래,
들어갔다 나오는 얼굴들이 다 하얗다
눈부신 나자로의 얼굴도 저랬을까
죽음 이후가 제발 그렇다면
먼저 가신 부모 형제들과
아기 때처럼 발가벗고 앉아
오로지 득도에만 골몰한
민달팽이로 모여 사는 것도 행복한 일
오늘 무언가를 잊고 싶다면
지하 사우나로 가보라
그곳 환풍기에서 올라오는 훈김만으로도
한 겨울에
라일락이 저리 만개한
[감상]
껍데기가 없는 민달팽이는 낮에는 돌 밑이나 흙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나옵니다. 이 시는 이런 달팽이의 생태를 통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근대의 목욕 개념은 살을 불려 죽은 표피를 벗겨내는 이태리타월 식의 위생이지만, 요즘은 지하 사우나가 찜질방으로 변모해 목욕개념보다는 더 넓은 의미를 포괄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쉬고 잠자고 친구들과 놀기 위해 사우나로 몰려듭니다. 이 시는 이런 지하 사우나를 <벌거숭이들이 버글버글하다는 상상>으로 표현해 생경하고 낯선 공간으로 변모시킵니다. 여기에 이 시의 매력이 발산됩니다. 사실 사우나에서는 누구든 벗어야 합니다. 정치인이건 문신한 조폭이건, 군인이건 아줌마건 처녀건 모두 남탕 여탕에서 맨몸뚱아리로 마주합니다. 이런 풍경이야말로 <민달팽이로 모여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맨몸들을 훑고 나온 증기는 이제 환풍기로 밀려나와 한겨울에도 <라일락>을 꽃피웁니다. 꽃도 이렇게 징글맞은 사람들에 취해 제 향기로 깨어나는데, 그 앞에서 사소한 집착이 어디 떠올려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