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 고영민/ 《실천문학》 시인선 (2005)
나무 한 권의 낭독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
[감상]
요즘 시 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한 권의 시집으로 마음이 환해질 수 있다면 그 온기로 다시 세상을 대할 수 있다면, 세상은 좀더 아름답고 따뜻해지겠지요. 이 시는 겨울이 되면서 점점 앙상해지는 나무에서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그 수많은 나뭇잎이 책 속의 페이지가 되고, 그것을 읽는 바람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 책이 다 떨어져 없는 <철심> 같은 기둥으로 선 나무는, 제 스스로 완성한 책을 <바람의 입>을 빌려 천천히 낭독하게 됩니다. 들리십니까?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그것은 나무가 제 잎을 다 버리고서야 읽을 수 있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신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