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꽃기린》/ 유정이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황금알》시인선 35
불우를 씻다
술취해 돌아온 그의 하루를 부축해
안으로 들인다 어느 지점에서 일어난
추돌사고였을까 생각을 들이받히고
얼마나 심하게 우그러졌던 것인지
일그러진 얼굴 제대로 펴지지 않는다
외로 꼬인 고개 바로 누이고
옷을 벗겨준다 못다 한
주행이 있다는 듯 그는 선뜻
앙다문 고집을 벗지 않는다 미처 속도를
떼지 못한 발끝에 가지 않은 길 도르르 말려있다, 입안 가득
뱉지 못한 말들 재갈처럼 물려 있다
벗은 그의 몸을 씻겨준다
너무 많이 먹었거나
잘못 삼켰던 말의 흔적들 선연하다
뒷주머니에 찔러주었던 마음
어디에 떨어뜨리고 왔는지
바닥까지 내려서도 보이지 않는다
단 한번도 그는 내게
무방비하게 자신을 맡긴 적 없었다
생애 처음 내게 투신한
벗겨진 남자의 몸을 받아 안는다
어디쯤 두고온 정신을 데리러 갔는지
그러다 곧 깜박 두고온 자신을 만났는지
씻겨진 그가 눈도 뜨지 않고 빙긋, 웃는다
닦인 것은 그의 오물인데
말갛게 씻긴 것은 그가 아니다
[감상]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중요한 사안이 술자리에서 결정되고는 합니다. 그럴 때마다 이 시대의 고단한 가장들은 늦은 밤까지 술자리를 견뎌야 합니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절제하다가도 모임이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긴장이 풀려 취기가 더욱 괴롭게 할 것입니다. 때론 격론이 오갔을지도 모를 그 자리를 ‘추돌사고’로 이어가면서 ‘그’를 보듬고 씻기는 애정이 곳곳에 배여 있습니다. ‘생애 처음 내게 투신한/ 벗겨진 남자의 몸을 받아 안는’ 그 상황이 눈에 선한 건, 나도 당신도 한때 받아주거나 기대야 했던 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연의 두 줄은, 이 시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가장 아름다운 수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