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지푸라기 허공 - 나희덕

2001.06.20 13:38

윤성택 조회 수:1516 추천:287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 창작과 비평사


           지푸라기 허공
                  
  
           그의 옷에 묻어온
           지푸라기를 털어내는 동안 십년이 지났다
           술에 취해 잠든 그의 머리맡에 앉아
           지푸라기를 털어내면서
           나는 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것일까
           두 손에 고인 가벼운 목숨은
           작은 한숨에도 파르르 떨고는 했다
           길 위에 누운 등의 무게를,
           누워서 바라보았을 별의 빛남을,
           그 추운 잠을 지푸라기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푸라기를 차마 쓰레기통에 넣지 못했다
           얼어붙은 창문을 열고 날려보낸 그 홑겹의 날개들은
           쐐기처럼 단단하게 허공에 박혔다
           창을 열어도 보이지 않는 것은
           어둠 때문이 아니다 지푸라기의 아우성으로
           가득 찬 허공, 차라리 나는 거기에 불을 놓았어야 했다
           일찍이 내 마음을 검게 그슬린 火田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을 일구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그의 등에 묻은 지푸라기만 하염없이 떼어내고 있는
           밤, 그 메마른 되새김질로 십년이 지났다
           자신이 점점 제웅으로 변해가는 줄도 모르고



[감상]
이 시는 남편에 대한 시 같습니다. 사업 때문에 좌절한 남편에 대한 생각. 그 옆에서 지푸라기를 떼어내며 십년이 지났나 봅니다. 그를 섬기는 시선이 화자의 심경과 어울려 진솔하게 드러납니다. 스스로가 제웅이 되어가는 희생의 모습, 울림이 깊어집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31 눈의 여왕 - 진은영 2010.01.13 1042 105
1130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 신해욱 2010.01.12 1283 109
1129 동사자 - 송찬호 2010.01.09 1032 118
1128 음악 - 강성은 2010.01.07 1171 133
1127 합체 - 안현미 2010.01.06 1029 146
1126 2010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10.01.05 1349 138
1125 단단해지는 법 - 윤석정 2010.01.04 1251 132
1124 겨울의 이마 - 하정임 2009.12.18 1189 127
1123 어느 행성에 관한 기록 - 이정화 2009.12.16 929 125
1122 자폐, 고요하고 고요한 - 최을원 2009.12.15 949 129
1121 붉은 염전 - 김평엽 2009.12.10 954 131
1120 못을 박다가 - 신현복 2009.12.07 1003 112
1119 연두의 시제 - 김경주 [1] 2009.12.02 1087 119
1118 고백 - 남진우 2009.11.27 1144 131
1117 오늘은 행복하다 - 김후란 2009.11.26 1284 118
1116 사랑은 매일 걷는 길가에 있다 - 구재기 2009.11.24 1304 122
1115 야생사과 - 나희덕 2009.11.23 1068 124
1114 추상 - 한석호 2009.11.21 855 119
1113 대설 - 정양 2009.11.19 905 109
1112 나무 안에 누가 있다 - 양해기 2009.11.18 906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