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2001.06.21 17:44

윤성택 조회 수:1636 추천:276

『앵무새의 혀』/ 고정희 (김현 엮음)  / 문학과지성사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低音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이 되어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앙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꿈의 해저로 내려가는 사다리
        그 어딘가에 너는 산다고 했다
        그곳에 카메라를 내리고
        나는 수백 번의 서터를 눌렀다
        너의 가슴을 담기 위하여
        너의 아픔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물푸레 사이에서 셔터를 누르고
        돌고래떼와 암초 사이에서
        찰칵찰칵 셔터를 눌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
        것이다


[감상]
너에 대한 열망, 이 시는 어떠한 시적공간도 고여 있지 않습니다. 상상력으로 끊임없이 시공간을 초월하며 너를 쫓습니다. 결국 화자의 그리움은 너에 대한 부재에서 오는 슬픔입니다. 연시풍이 될 수도 있는 화법을, 진지한 시선으로 담아내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31 눈의 여왕 - 진은영 2010.01.13 1042 105
1130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 신해욱 2010.01.12 1283 109
1129 동사자 - 송찬호 2010.01.09 1032 118
1128 음악 - 강성은 2010.01.07 1171 133
1127 합체 - 안현미 2010.01.06 1029 146
1126 2010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10.01.05 1349 138
1125 단단해지는 법 - 윤석정 2010.01.04 1251 132
1124 겨울의 이마 - 하정임 2009.12.18 1189 127
1123 어느 행성에 관한 기록 - 이정화 2009.12.16 929 125
1122 자폐, 고요하고 고요한 - 최을원 2009.12.15 949 129
1121 붉은 염전 - 김평엽 2009.12.10 954 131
1120 못을 박다가 - 신현복 2009.12.07 1003 112
1119 연두의 시제 - 김경주 [1] 2009.12.02 1087 119
1118 고백 - 남진우 2009.11.27 1144 131
1117 오늘은 행복하다 - 김후란 2009.11.26 1284 118
1116 사랑은 매일 걷는 길가에 있다 - 구재기 2009.11.24 1304 122
1115 야생사과 - 나희덕 2009.11.23 1068 124
1114 추상 - 한석호 2009.11.21 855 119
1113 대설 - 정양 2009.11.19 905 109
1112 나무 안에 누가 있다 - 양해기 2009.11.18 906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