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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로 4블럭 - 김성수

2003.03.05 09:14

윤성택 조회 수:988 추천:202


「한천로 4블럭」/ 김성수/ 『현대시』 2003년 3월호, 현대시 디지털 신인상 당선작



        한천로 4블럭


        한천에서 비릿한 안개를 풀어낸다
        비누 거품으로 머리를 감고 있는 나무들과
        적벽강에 서 있는 것 같은 영구 임대 아파트들이
        안개에 푹 잠겨 공중 목욕탕 욕조 속의 노인처럼
        흥얼거리는 시조 한 가락을 뽑는 듯한 풍경이다

        정거장에 서는 버스마다 안개만 실어나르는,
        한천로 4블럭에는 구멍난 양말을 꿰메는
        어머니의 늘어난 메리야스같이 헐렁한 빈 터에도
        삐거덕거리는 그네 하나에 바람만 앉아 흔들리고
        활기라는 단어를 텅텅거리며 가지고 노는 건
        근처 전자공단의 젊은이들뿐이다

        도로변 신문 가판대 뒤쪽에서 몇 사람이 바둑을 둔다
        팔순이 넘은 노인은 세월에 수담을 하듯
        찢어온 기보를 복기해 보며 살아온 삶도 복기를 하는 걸까
        내내 손가락을 짚어가며 반상에 골몰해 있다
        건너편 중년의 사내는 후절수를 두고선 사필즉생 운운하며
        너스레를 떨고, 훈수하는 추임새 마다 바둑판을 달궈놓고
        대마가 몰린 듯 궁색한 삶들이 불계를 꿈꾸고 있다

        한천로가 머리띠를 두른 듯 노란 개나리꽃 늘어선 봄날도 가고
        녹이 슨 오동잎 뒹구는 가을의 철문을 열고
        자식을 기다리는 노인의 청춘가는 구슬프고
        지팡이를 짚고 먼저 일어서는 한천의 안개가
        쨍하니 태양을 내놓듯이 자식들의 안부 전화라도 있을런지…
        한천로 4블럭의 쓸쓸한 풍경을 지우고 싶은 마음을
        정거장에 멈춰 선 버스에 태워 보낸다

        다시 오수에 빠진 듯 고른 숨소리로 내려앉는 한천로 4블럭
        파지를 모으는 할머니의 아리랑 고개는 숨이 차고
        빨대로 쭈욱 빠는 요구르트같이, 안개도 사위어가면
        잘못 물린 틀니를 고쳐 끼우듯, 삐꺽거린 일상을 꽉 물고
        나아가는 소리가 살아 있는 그 곳
        저녁이면 뒤척이는 영구 임대 아파트의 불빛들이
        한천에서 잠못들며 뒹굴고 그렇게 살아서 빛나고 있다


        
[감상]
한천로변 임대 아파트에 사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소묘해낸 시입니다. 이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관찰이 있었을까 인상적입니다. '활기라는 단어를 텅텅거리며 가지고 노는 건/ 근처 전자공단의 젊은이들뿐이다' 이 표현에서 '공'이라는 표현이 없어도 공을 차는 젊은이들이 연상되는 것은 이 시의 매력적인 능청입니다. 노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은 쉬워도 이런 큰 틀에 담아내기가 쉽지 않을 듯 싶네요. 어느 미술관에서 한천로변 그림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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