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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10:38

윤성택 조회 수:2537 추천:334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이진명




우체통




나는 정류소 팻말 아래 진종일 서 있거나
잎새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아래 계절이 다 가도록 서 있곤 했다
가끔 네거리 지하도 입구에 벌거벗은 채 있기도 했고
공중전화 유리상자 곁에 멀뚱히 붙어 있기도 했다
나는 사람들의 앉은키 만큼밖에 크지 못했으며
검붉은 살색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다리로 온몸을 받쳐대고는 있었지만
몸통 속에는 사실 빈 어둠일 때가 많았다
그 어둠을 한번 휘이 저어 보라
견딜 수 없는 공포가 손을 해면처럼 잡아늘일 것이다
캄캄한 채 나는 항상 열려 있었다
지하도 계단에 이마를 박고 온통 구부린 사내의 치켜든 새까만 두 손바닥처럼
또 건너편 지하도 계단에서
갓난 것을 끌어안고 누더기 수건을 뒤집어쓴 여자의 무릎 앞 플라스틱 동전 바구니처럼
넣어다오, 살짝 가볍게
넣어다오, 깊고 은밀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내 어둠의 바닥에 떨어져 닿는 너희들의 탄식소리
나는 새까만 두 손바닥을 펼쳐 올리거나
동전바구니를 거느리지는 않았지만
안에서는 열릴 수 없는 외짝 입을 달고
거리거리마다 붙박혀 있곤 했다
적어 보내줘 적어 보내줘
본지역 기타지역 그 어디일지라도
때묻은 종이 꽃잎 위 너희 아까운 인장 찍으며, 그럼
死海에서 푸른 잎줄기를 물고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
그러나 나는 몸통 속 빈 어둠을 물리치려고
거지가 되기도 하고 외설이 되기도 했다
        



[감상]
생각하면 주위에 있었는지도 모르게, 큰 길가에나 공중전화부스 옆에 우체통이 있었습니다. 이 시는 그 우체통을 여러 시선으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편지 하나 들고 우체통을 찾았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면, '항상 열려 있다'만큼 와닿는 표현은 없을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 크리스마스 카드 봉투에 왜 흙이 묻었을까라고 수줍은 그녀에게 말못한 사정, 우체통을 보고 달려가다가 넘어졌다고 말하지 못하고 내내 우체통 탓만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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