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멀미」 / 이문재 / 『현대문학』2003년 5월호
꽃멀미
봄꽃들은
우선 저질러놓고 보자는 심산 같다
만발한 저 어린것들을
앞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 돼지저금통을 깨
외출하는 봄날 아침
안개가 걷혔는가 싶었는데
저런 저기 흰 벚꽃
박물관 입구 큰 벚나무
작심한 듯 꽃을 피워놓고 있었다
희다 못해 눈부시다 못해
화공약품 뿌린 듯한 오래된 벚나무
흰빛은 모든 빛을 거부해서 흰빛
가까이 가면 내가 표백될 것 같았다
동창 녀석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왼쪽 구두코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고
윗저고리에는 아직도 삼겹살 냄새
나트륨등 켜져 있는
농업박물관 입구
아무 말 없이 흰 꽃잎 두어 장
새벽 한 시 근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말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야 임마 내가 이렇게 떳떳한 것은
내가 이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야
아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감상]
내가 이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야, 봄날 이 말 한 마디가 결립니다. 가난도 선택할 수 있다니요. 상상력을 열어 놓은 서사적 구조도 벚꽃이라는 서정과 잘 맞물려 있습니다. 기어이 저지르고 싶은 것, 딸아이의 저금통, 윗옷에 배인 삼겹살 냄새, 빚처럼 불어나는 벚꽃의 풍경… 왠지 흑백사진처럼 쓸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