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깎으며」/ 김나영 / 『리토피아』2003년 여름호
사과를 깎으며
크고 붉은 사과, 반을 가른다.
농익은 단맛이 부패를 불러 들였던 걸까
겉보기와 다르게 내부에는 부패가 한참 진행 중이다.
씨방과 씨가 아직 꼭지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지만
단단한 육질이 꼭 감싸고 있는 건 단맛이 아니다, 부패의 방이다.
내가 믿는 겉모양이란 이렇게 속을 열고 보면 딴 얼굴일 때가 많다.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하는 이 시대의 불문율 앞에서
나는 여전히 내 눈에 의지하고 사물을 가늠하고 있지만
늙은 호박을 두드려보면
200년 된 고목의 내부에 손을 넣고 더듬거려보면
겉모양이란 중심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세상 어머니들의 속 얘기에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그들 내부에서도 깊은 울림이 파도처럼 밀려나온다.
중심을 비워 낸 그 자리,
투명한 공명통과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검은 곰팡이들.
세월의 무늬란 저런 것일까
고개 숙이고 깎는 사과 한 접시,
그 옆, 도려낸 부위와 껍질이 더 많이 쌓인다.
[감상]
사과를 깎으면서 시인은 중심과 겉모양에 대해 은유해냅니다. 특히 '겉모양이란 중심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자리잡고 있음을'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놓치 쉬운 내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요. 작은 일상에서 시를 포착해내고 거기에서 철학적 의미까지 되새김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네요. 세월의 무늬, 우리는 지금 어떤 속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