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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 들다 - 길상호

2003.06.10 18:00

윤성택 조회 수:1091 추천:154

「구멍에 들다」 / 길상호 / 『현대시』6월호



        구멍에 들다


        아직 몇 개의 나이테밖에 두르지 못한 소나무가 죽었다
        허공 기워 가던 바늘잎 겨우 가지 끝에 매단 채 손을 꺾었다
        솔방울 몇 개가 눈물처럼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나무가 죽자 껍질은 육체를 떠난 허물이 되어 떨어지고
        허연 속살을 살펴보니 벌레들이 파 놓은 구멍이 나무의
        심장까지 닿아 있었다 벌레는 저 미로와 같은 길을 내며
        결국 우화(羽化)에 이르는 지도를 얻었으리라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구멍 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 헤매고 있었겠지
        나무가 뒤척일 때마다 신음(呻吟)이 바람을 타고 떠돌아
        이웃 나무의 귀에 닿았겠지만 누구도 파멸의 열기 때문에
        소나무에게 뿌리를 뻗어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버레가 날개를 달고 구멍을 빠져나가면서
        나무는 모든 삶의 통로를 혼자 막아야 했으리라
        고목들이 스스로 준비한 몸 속 허공에 자신을 묻듯
        어린 소나무는 벌레의 구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있었다
        어쩌면 날개를 달고 나방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벌레도 알았으리라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죄과(罪過)는
        어떤 불로도 태워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평생을 빌며 그렇게 사라야 한다는 것을, 죽은 소나무 앞에서
        나는 한 마리 작은 솔잎혹파리가 되어 울고 있었다
  

[감상]
이 시는 솔잎혹파리의 생태를 관찰해내고 거기에서 우리 삶을 은유하는 진지함이 배여 있습니다. 말미에 이르러 왜 나방들이 불길에 뛰어드는지 이 시는 '죄과'라는 색다른 통찰로 답을 주는군요. 어린 소나무가 말라죽은 이유가 밑둥을 관통하고 알을 산란한 솔잎 혹파리 때문였다는 사실. 그곳에서 살아 나온 존재가 혹시 화자 자신이지 않을까 하는 반성. 혹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상처를 담보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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