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냉장고 소년 - 진수미

2005.09.15 15:28

윤성택 조회 수:1709 추천:224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진수미/ 《문학동네》시인선 (근간)



  냉장고 소년

  이 속은 환한데? 이곳은 환한 내부.
  멀리 안 가도 되겠어, 엄마
  어떠한 환속도 우릴 기다리지 않고,

  이곳은 진짜로 환하군. 강보에 싼 아가들이 유골로 박혀
있군.
  신문지로 둘둘 말거나 쇼핑백에
  대충 접어 넣지 말아요. 아기는
  버리실 때에도 예쁘게,

  조심하거라. 잘못 짚으면 와르르 무너질 거야.
  이 방엔 산발한 어머니가 참 많이도 매달렸군.
  배곯은 아기울음은 나를 흥분시키지,
  유두 끝에 물큰 침이 돌지.

  콩들이 쏟아진다. 얼어서 뭉쳤던 모조 눈알도 쏟아진다.
소년은 제 불알을 놀듯 어미의 젖을 잡아당긴다.  찬란한
오색 젖이 뿜어지고  흰개미들이 얼른 길을 덮는다. 나는
송사리야. 물살에 머릴 박고 꼬리를 살래살래 치며 엄마,
이곳은 납골당이지? 나는 부장품인가?  엄마, 이곳은 늘
환하고  언제나 곡소리를 모방한 음악이 흐르는군.  곡을
따라 내 유두엔 어느새 머리칼이 자랐군.


[감상]
영안실 시체보관용 냉장고에는 죽은 이들이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늦은 밤 냉장고의 온도가 올라가면 자동시작기(모터)가 작동하고, 콤푸레샤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마치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웅얼웅얼…>소리 같은. 이 시에는 죽은 아이와 엄마, 그리고 시 속의 화자가 빙의(憑依)현상처럼 한데 뒤엉켜 목소리를 내는 듯한 서늘함이 있습니다. 끔찍하거나 기괴한 풍경너머 정자가 연상되는 <송사리>도 등장하고요. 죽은 사람의 몸에도 단백질로 인해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란다고 합니다. <나는 부장품인가?> 몸은 죽었으나 의식이 살아 있는 냉장고 속 풍경, 어떠십니까?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11 누와르론(論) - 박수서 2003.08.07 955 149
1010 빨간 우편함 - 김규린 2011.04.05 2063 149
1009 마음의 서랍 - 강연호 2002.05.24 1408 150
1008 바람소리를 듣다 - 장만호 2003.02.10 1179 150
1007 꽃멀미 - 이문재 2003.04.29 1213 150
1006 봄날의 산책 - 박순희 [2] 2007.01.27 1705 150
1005 사과를 깎으며 - 김나영 2003.05.26 1027 151
1004 수도승 - 홍일표 2007.01.16 1258 151
1003 안드로메다를 등에 지다 - 김산 2007.03.03 1327 151
1002 비의 뜨개질 - 길상호 [1] 2007.03.07 1423 151
1001 누가 내건 것일까 - 장목단 2003.04.22 1018 152
1000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정일근 2003.09.01 1185 153
999 상상동물 이야기·5 - 권혁웅 2003.03.28 941 154
998 구멍에 들다 - 길상호 2003.06.10 1092 154
997 민달팽이들 - 문성해 2007.03.23 1329 154
996 늙은 정미소 앞을 지나며 - 안도현 2003.04.21 976 155
995 석모도 민박집 - 안시아 2003.05.21 1021 155
994 신발 - 최두석 2003.07.03 1282 155
993 녹의 힘 - 김봉식 2007.03.20 1208 155
992 버스 정류장 - 이미자 2007.04.26 1672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