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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 한석호

2009.11.21 14:03

윤성택 조회 수:855 추천:119

  <추상(秋想)> / 한석호 (200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시와정신》2009년 가을호

          추상(秋想)

        누가 저녁을 준비하는지 서쪽 하늘이 소란하다.
        이런 어스름녘을 걷다보면
        나는 나를 구속하는 어떤 의무도
        내가 짊어져야 할 지상의 어떤 부채도 모두
        가을 들판 아래 묻고 싶다.
        누군가가 또 밥을 푸는지 하늘에 김이 뽀얗게 서려있다.
        나는 한 그릇의 밥 대신
        잘 보관한 한 장의 추억을 생각하고
        까마득한 그 언덕 너머로 안부를 던지며
        흐르는 강물 위로 길을 내고 싶다.
        풀벌레의 그 쓸쓸하고 푸르스름한 음색이 되어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다.
        이제 누군가가 기도를 올리는지 나뭇가지마다
        엄숙함이 서늘하게 서려 있다.
        한 동이의 취기와 한 짐의 우울과 하릴없는
        내 낯설음을 덜어내기 위해 저 경건한 의식 앞에서
        난 가랑잎처럼 가벼워져야 한다.
        바싹 마른 영혼들을 끌어 모아 들녘 한가운데 모닥불을 놓고
        한 발자국씩 더 멀리 방황하고 있다.
        새벽안개가 되어 강가를 서성이고 있다.

        
[감상]
추상(秋想), 뜻 그대로 가을의 생각입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요즘, 우리의 몸도 마음도 계절에 반응합니다. 추위로 움츠려진 몸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실존’으로 감지되고, 마음 또한 허허로운 풍경에 감정이 이입되곤 합니다. 구절구절 소박한 ‘싶다’의 어투가 진솔하게 읽힙니다. 기실, 주위에 진심을 가리고 짐짓 하는체만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묻고, 길을 내고, 떠나고 싶은 그 바램이 소통의 단초이면서 이 시의 진정성이기도 합니다. 복잡하지 않고 편안하게 마음으로 읽혔다면, 우리는 ‘가벼워’진 것이며 서성일 '강가'에 당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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