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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거리는 그 흰빛 - 이근일

2006.06.05 17:48

윤성택 조회 수:1653 추천:261

<가물거리는 그 흰빛> / 이근일/ 《현대문학》2006년 6월호 신인 당선작 中


  가물거리는 그 흰빛

  병원 침대에 눕자마자 내 얼굴 위로 흰빛이 쏟아진다 심전도기계 위로 드르륵 종이가 말려 올라오는 동안 나는 내 양 옆구리에서 길게 돋아난 핑크빛 지느러미를 보았다 잠시 심해 속을 유영하는 나를 떠올렸던가, 불현듯 내 안에서 고래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거의 어느 시간을 품은, 심장 속 그 한 방울의 피로부터 누군가를 부르는 간곡한 울음소리가

  전생에 나는 분홍고래가 아니었을까 일생 동안 깊은 바닷속을 누비며 이를테면 암초 위에 착생하는 산호;그가 살면서 촉수에 머금는 독에 대해서라거나, 사랑에게 버려진 채 그 독 속에 숨어 지내는 어떤 神의 아픔에 대하여 슬픈 빛깔의 온몸으로 노래하던, 그때도 너는 내 안에 가득 고인 어둠이 두려워 기어이 나를 배반했을 것인가, 울음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사이 내 감은 눈 속으로 캄캄한 바닷물이 밀려들어오고
        
  바닷속 나는 흰빛을 따라가고 있었다 저만치 그 흰빛은 너의 얼굴을 닮고, 또 네 고운 목소리를 닮은 듯했다 그러나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너의 얼굴을 조금씩 뭉개고 지우던 흰 빛, 침묵하며 멀리멀리 달아나던 그 흰빛, 나는 지쳐서 점점 해저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 간호사가 다가오고 심전도기계가 작동을 뚝 멈췄다 순식간에 내 눈꺼풀 밖으로 바닷물이 다 빠져나갔지만, 나는 한동안 그대로 누운 채 맥없이 파닥거렸다, 침대였던가 뻘이었던가, 가물거리는 그 흰 빛 속에서.


[감상]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죽어가고 있는 화자의 내면이 <분홍고래>와 오버랩되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입니다. 이 시는 고래가 초음파로 소통한다는 상식의 지점에서 <심전도기계>로 옮겨가며 자연스러운 상상력으로 몰입을 이끕니다. 이렇게 현실의 중환자실과 상상의 바닷속을 넘나들며 쫓는 <흰 빛>은 화자의 정체성이자 삶에 대한 마지막 미련일지 모릅니다. 결국 심전도와 맥박의 생체신호는 끊기고, 화자는 쓸쓸히 생사의 경계에서 훌쩍 죽음으로 접어듭니다. 이 시가 여느 묘사와 다른 점은 <흰 빛>의 발견에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갖는 연민과 회한을 하나의 이미지로 뭉쳐냈다고 할까요. 간만에 묵직한 울림을 느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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