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붉은 현기증》 / 천수호 (2003년 『조선일보』로 등단) / 《민음의 시》 153
요긴한 가방
씨앗도 아니면서
들썩거리는 봄 씨앗같이 입 헤 벌리고
잠에 취한 사람들,
자정이 넘은 지하철 안은 헐렁헐렁하다
씨앗마다 흔들리는
가방 하나씩 품었다
이제
씨방은 입이 아니라 가방이다
가방 속에는
꽃잎 덧칠하는 붉은 립스틱과
꽃술 올리는 마스카라
풀잎색 아이섀도가 들어 있다
입을 꼭 다문 여자가
박쥐처럼 매달린 TV 화면을 본다
지하철이 가방처럼 품고 있는 텔레비전
열차가 흔들릴 때마다 뉴스 자막도 흔들린다
흔들림은 애초에 달래고 어르는 몸짓이었듯
화면에 중독된 그녀도 잠든다
이내 벌어지는 색 바랜 입술
가방을 놓치면 피울 수 없는 새잎과 새 꽃술
가방은 이제 어디든 따라간다
길만 따라가는 이 도시도
하나의 요긴한 가방이다
[감상]
씨방은 밑씨를 품은 통통한 주머니 모양입니다. 이 씨방이 입이 되고 가방이 되고 그러다 그 끝을 쫓다보면 하나의 도시가 되기도 합니다. 시적 대상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 내면의 풍경과 일치되는 상상력의 확대가 인상적입니다. 가방 속 화장품이 거울 앞에서 외모를 돋보이게 하듯, 씨방뿐인 가지에도 때가 되면 꽃이 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꽃나무는 제 안에 립스틱이며 마스카라며 아이섀도를 품고 있는 것이겠지요. 각박하고 무료한 일상의 풍경을 이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재해석하는 표현도 표현이거니와, ‘길만 따라가는 이 도시도/ 하나의 요긴한 가방이다’에 이르는 통찰도 남다릅니다. 시인의 명징한 자서에도 그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시는 연민에서 출발한 사물 이해법/ 그것이 사물을 보게 한, 또는 보이게 한 시력이다/ 내 시 속에 늘 오도카니 있는 존재들, 그 외딴 것들이 느끼는/ 아주 붉은 현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