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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플라타너스가 이순을 맞은 이종욱에게> / 이종욱/ 《창작과비평》 2005년 봄호

        마당의 플라타너스가 이순을 맞은 이종욱에게

        꽤 너끈한 그림자 만들어주다가
        무성한 잎 속에 징그러운 벌레까지 키우다가
        어느새
        혹한에 이파리 몇낱 끌어안고
        까치둥지 여전히 키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알겠지 비로소
        행복이 무엇인지
        만족이 따뜻함이
        사랑이 무엇인지
        나눔이
        더불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지 비로소
        느끼겠지
        짜릿한 생기를
        어차피 후회할 것은 없다는 것을
        남겨야 할 것은 없다는 것을

        무척 궁금하지
        나에게도
        회한이
        서러움이 있는지
        나는 그저 이웃집의 개 짖는 소리가 좋고
        이 마을의 적막, 짙은 어둠마저 좋다
        개천의 물안개
        홀쭉해지고 키 작아진 갈대들이 정겹다
        인적에 놀라 날아오르는 산비둘기들이
        쫑쫑쫑 겁 없이 찻길을 가로지르는 꿩들이
        앞산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일가붙이들이 미덥다
        그렇지 않은가

        정원에서 키울 나무가 아니라고
        나를 베어버리려 했지 너는
        무엇을 길러본 적 있니
        누구에게 빈자리 내어준 적 있니
        소갈머리를 베어내고 또 무엇을 더 베어내야 할지 모르는
        너는 어디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인간이냐
        ‘휴업중인 시인’이라는데
        나는 태어나면서 시인인 것을

        지그시 만져보라 나를
        거친 껍질을 쓰다듬어보라
        그 밑의 버짐을
        흉터 많은 몸통을
        슬며시 끌어안아보라


[감상]
경기도 파주 예술마을 헤이리에 ‘북카페 반디’라는 곳이 있습니다. 작고 아담한 그 카페 앞에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 시는 그 플라타너스가 카페 주인과 마주 앉아 나누는 마음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플라타너스의 서정적 목소리를 통해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을 깨닫게 하고, 진정한 시인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이순이 되어서도 시를 쓸 수 있을까 싶어, 더욱 잔잔한 감동이 이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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