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당신이라는 이유 - 김태형

2011.02.28 16:13

윤성택 조회 수:1908 추천:126


《코끼리 주파수》/  김태형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 《창비 시인선》327

          당신이라는 이유
        
        발목께 짐을 내려놓고 서 있을 때가 있다
        집에 다 와서야 정거장에 놓고 온 것들이 생각난다
        빈 저녁을 애써 끌고 오느라
        등이 무거운 비가 내린다
        아직 내리지 못한 생각만 지나갈 때가 있다
        다 늦은 밤 좀처럼 잠은 오지 않고
        창문 가까이 빗소리를 듣는다
        누가 이렇게 헤어질 줄을 모르고
        며칠 째 머뭇거리고만 있는지
        대체 무슨 얘길 나누는지 멀리 귀를 대어 보지만
        마치 내 얘기를 들으려는 것처럼
        오히려 가만히 내게로 귀를 대고 있는 빗소리
        발끝까지 멀리서 돌아온
        따뜻한 체온처럼 숨결처럼
        하나뿐인 심장이 두 사람의 피를 흐르게 하기 위해서
        숨 가쁘게 숨 가쁘게 뛰기 시작하던 그 순간처럼        


[감상]
버스나 지하철에 무엇을 놓고 내렸다거나, 무언가에 골몰하는 바람에 내려야할 역에서 못 내린 경험. 지나고 나면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생각은 여전히 순환버스처럼 과거로만 지나치고, 밤은 잠보다 독해 자꾸만 뒤척이게 합니다. 이 시는 이렇게 늦은 밤 빗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무심히 듣고 있는 것이라고 적습니다. 그만큼 ‘내 얘기’는 절실하며 뜨겁습니다. 인체의 혈관을 모두 합한 길이가 약 120,000Km로 지구를 3바퀴 돌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하나 뿐인 심장에 두 사람의 피가 흐를 수 있다면 멀리서 돌아온 이 따스함의 순간이, 당신이라는 이유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31 죄책감 - 신기섭 2006.05.29 1871 243
130 춤 - 진동영 2006.06.21 1730 243
129 옥평리 - 박라연 2002.08.14 1380 244
128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2001.08.04 1241 245
127 은박 접시 - 정원숙 [2] 2005.07.15 1437 245
126 장지 - 박판식 2001.10.09 1448 247
125 취미생활 - 김원경 [1] 2006.03.24 1928 247
124 축제 - 이영식 [3] 2006.07.11 2034 247
123 낡은 의자 - 김기택 [1] 2001.07.30 1574 248
122 눈길, 늪 - 이갑노 2006.03.29 1659 248
121 하지 - 조창환 2001.08.24 1259 249
120 별 - 김완하 2002.08.12 2923 249
119 책들 - 강해림 2006.07.07 1882 249
118 마포 산동네 - 이재무 2001.05.08 1695 250
117 聖 - 황학주 2001.10.18 1310 250
116 고백 - 정병근 [1] 2005.08.17 2711 250
115 흔적 - 배영옥 [2] 2005.11.16 2277 250
114 사랑은 - 이승희 2006.02.21 2977 250
113 날 저문 골목 - 안숭범 2006.04.07 1612 250
112 해바라기 - 조은영 [1] 2005.11.01 3023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