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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감옥 - 이경임

2001.05.31 10:28

윤성택 조회 수:1397 추천:268

부드러운 감옥 / 이경임/  문학과지성사



부드러운 감옥


  아침, 너울거리는 햇살들을 끌어당겨 감옥을 짓는다. 아니 둥지라고 할까 아무래도 좋다 냄새도 뼈도 없는, 눈물도 창문도 매달려 있지 않은 부드러운 감옥을 나는 뜨개질한다 나는 높은 나무에 매달리는 정신의 모험이나 푸른 잎사귀를 찾아 먼 곳으로 몸이 허물도록 기어다니는 고행을 하지 않는다 때로 거리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을 바라본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잎새들의 춤이 바람이 불 때면 햇살 속에서 눈부시다 잎새들은 우우 일어서며 하늘 속으로 팔을 뻗는다 내가 밟아 보지 못한 땅의 모서리나 계곡의 풍경이 나를 밟고 걸어간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걸어나가고 싶다

  거리에 가로등이 켜진다 가로등은 따뜻한 새알 같다 건물 속에서 사람들이 새어나온다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가로등 쪽으로 걸어간다 지상에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가로등을 지나쳐 지하도 입구 속으로 사라진다 옆구리를 더듬어 본다 하루 종일 허공에 매달려 있던 거미가 기어 나온다 거미의 그물을 뒤져본다 낡은 점자책이 들어 있다 어둠 속에서 나의 뻣뻣한 손가락들이 닳아진 종이 위의 요철 무늬들을 더듬는다 몇 번을 솟아오르다 또 그만큼 곤두박질친 다음에야 희망이란 활자를 읽어낸다 문장들이 자꾸만 끊어진다 길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감상]
희망을 아우르는 단단한 의미의 문장들, 전형적인 신춘문예적 시입니다. 또한 산문시의 묘미를 잘 살린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도 돋보이고요. "차라리 삶은, 탕진되는 매순간마다 죽음의 향기를 흘리며 쓸쓸히 늙어가는 삼류 여배우의 독백과 같은 것이다." 그녀의 자서에 밝힌 글귀가 와닿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감옥에는 무엇이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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